고대사

전함 포템킨: 흑해를 뒤흔든 반란과 격변의 인생

전함 포템킨: 흑해를 뒤흔든 반란과 격변의 인생

흑해 함대의 주력으로 취역하다

전함 '포템킨(Potemkin)'은 1903년 러시아 흑해 함대에 정식으로 취역했습니다. 당시의 전형적인 전함으로, 함수와 함미에 각각 배치된 연장 포탑 2기에 305mm(12인치) 주포 4문을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주포 외에도 부포로 152mm 함포 16문과 76mm 포 14문, 47mm 포 6문을 갖췄으며, 어뢰 발사관 5문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장갑은 최대 229mm(9인치) 두께에 달했고, 전장은 115.36m, 배수량은 12,582톤, 최대 속력은 다소 느린 16노트였습니다. 승무원은 총 741명이었습니다.

배 이름의 유래

이 배의 이름은 예카테리나 2세의 정부(情夫)이자 원수, 그리고 수상을 지낸 포템킨 공작에서 따온 것입니다. 물론 이 전함이 특별히 뛰어난 함선이라고 볼 수는 없었지만, 당시 가장 유력한 가상 적국이 튀르키예 해군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성능으로 평가되었습니다.

1905년, 역사에 남을 반란이 일어나다

그러나 이 배가 진정으로 유명해진 결정적 계기는 무장 자체가 아니라 반란이었습니다. 1905년 6월 27일, 열악한 식량과 부실한 급여에 항의한 일부 선원들이 함내에서 폭동을 일으키면서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갔던 것입니다.

당시 러시아 해군의 사기는 일본에 참패를 당한 직후라는 이유로 바닥에 있었습니다. 이 패전은 볼셰비키의 선동과 맞물려 러시아 전역에서 충돌을 촉발하는 배경이 되었는데, 바로 이 시기에 일어난 포템킨호의 반란은 이후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명작 영화 <전함 포템킨>으로 영원히 기록되게 됩니다.

반란을 일으킨 선원들은 함장을 비롯한 장교들을 제거한 뒤, 며칠 동안 흑해의 여러 항구를 떠돌아다녔습니다. 결국 추격을 피해 배는 루마니아로 도피했고, 그곳에서 반란군들은 안전 밸브를 열어 스스로 배를 침몰시킨 뒤 망명을 요청했습니다.

'판텔레이몬'이라 불리던 시절

그러나 러시아 해군은 얕은 수심에 가라앉은 배를 인양했고, 그리하여 '포템킨'은 1905년 7월 27일 성 판텔레이몬의 축일에 세바스토폴로 귀환할 수 있었습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배의 이름은 '판텔레이몬(Panteleimon)'으로 개명되었으며, 이 배는 이후 12년 동안 이 이름으로 불리게 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과 계속된 개명의 행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배는 튀르키예기를 단 독일 함선들—순양전함 '괴벤(Goeben)'과 경순양함 '브레슬라우(Breslau)'—과 교전했습니다. 괴벤은 당시 최신예 순양전함으로 280mm(11인치) 주포 10문을 장착한 강력한 함선이었고, 브레슬라우는 소형 경순양함이었습니다. 판텔레이몬은 괴벤과 두 차례 조우했지만, 다행히 손상 없이 버텨냈습니다.

1917년 차르 체제가 붕괴하자 배의 이름은 다시 '포템킨'으로 환원되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름이 또 한 번 바뀌어 이번에는 '자유의 투사(Freedom Fighter)'라 불리게 됩니다.

비극적인 최후

1918년, 이 배는 세바스토폴에서 독일군에게 나포되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볼셰비키와 싸우던 백군(白軍)과 영·프 연합군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영국군은 볼셰비키가 배를 확보하더라도 사용하지 못하도록 엔진을 파괴해 버렸습니다. 그 후 이 배는 방치된 채 방치와 부식 속에 방치되다가, 마침내 1924년 해체되며 화려했으나 격랑 많았던 생을 마감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