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몇 주간 전 세계 언론 곳곳에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라는 이름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소련(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합) 시절을 교과서로 배운 40대 이상 세대에게는 익숙한 지명이지만, 1990년대 초 이후 태어난 세대에게는 지도에서 새롭게 보이는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두 이름은 오랜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가 얽힌 동유럽 최대의 다민족 분쟁의 중심에 서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우크라이나와 크리미아를 둘러싼 기원, 언어, 역사, 그리고 이 지역이 직면한 지정학적 문제까지 체계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제국의 그림자: 러시아의 지정학적 확장 전통
러시아 제국은 과거의 모든 위대한 제국과 마찬가지로, 자국의 지정학적 이익을 방어할 수 있는 방향으로 영토를 확장해 왔습니다. 대부분의 경우 이러한 이해관계는 인류의 생존을 보장하고 역사적 적으로부터 자국을 지키는 천연자원 확보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1991년, 소련 붕괴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1991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USSR)이 붕괴하면서 우크라이나는 동유럽 공산권의 많은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면적 약 60만 3,000㎢, 인구 약 4,800만 명의 국가입니다. 인구 구성은 우크라이나인이 73%, 러시아인이 22%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몰도바, 루마니아, 불가리아, 벨로루시, 타타르, 폴란드 출신입니다.
동서 사이: 유럽연합과 러시아의 접점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유럽연합(EU) 사이에 위치한 지리적 조건 때문에 양대 블록의 정치·경제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요충지입니다. 서쪽으로는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몰도바와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몰도바를 제외한 국가들은 모두 EU 회원국입니다. 동쪽으로는 러시아와 광활한 국경을 공유하고 있습니다.
키예프 루스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러시아
러시아는 14세기부터 키예프에서 탄생한 최초의 슬라브 국가의 계승자로 자처해 왔습니다. 이러한 역사 의식은 푸틴 정부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을 반대하는 배경을 설명해 줍니다. 러시아는 1991년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인정했지만, 자국의 정체성과 밀접하게 연결된 영토 상실은 여전히 민감한 문제로 남아 있습니다. 특히 중부 유럽과 흑해 사이로 러시아 국경이 멀어진 상황에서, 러시아는 20년 임대 계약으로 세바스토폴 항구 일부를 사용하며 해군 함대를 유지해 왔습니다. 이는 러시아 당국에게 지정학적 이익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크리미아: 흐루쇼프가 넘긴 흑해의 열쇠
1954년 소련 지도자 니키타 흐루쇼프는 크리미아 지역을 우크라이나에 귀속시켰습니다. 당시 크리미아 인구의 70%는 러시아인이었으며, 이 지역은 흑해 통제권을 행사하는 데 필수적인 요충지였습니다.
석유와 가스: 우크라이나가 쥔 에너지 패권
2004년까지 우크라이나의 경제 성장은 최대 무역 파트너인 러시아가 대량의 석유와 가스를 공급해 준 덕분에 큰 혜택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우크라이나는 유럽 최대 규모의 석유·가스 파이프라인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어, EU는 우크라이나를 경유하는 가스와 석유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대부분의 서유럽 국가들은 우크라이나에 접근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노력해 왔습니다.
오렌지 혁명: 2004년 선거 부정과 시민의 선택
2004년, 당시 총리였던 빅토르 야누코비치(Victor Yanukovych)는 야당 후보 빅토르 유셴코(Victor Yushchenko)의 대선 승리를 저지하기 위해 선거 부정을 벌였습니다. 야누코비치가 당선에 성공하자 전국적으로 시위가 촉발되었고, 불법 선거에 항교하기 위해 결성된 이 운동은 '오렌지 혁명'으로 알려졌습니다. 결국 우크라이나 대법원은 선거 무효와 재선거를 판결했고, 재선거에서 야당 후보 유셴코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야누코비치의 복귀와 EU 협상
2009년 치러진 새 대통령 선거에서 야누코비치는 우익 야당 후보 율리아 티모셴코를 누르고 승리했습니다. 친러 성향에도 불구하고 야누코비치는 집권 기간 동안 우크라이나의 최대 상업 파트너인 프랑스와 독일이 주도하는 유럽연합과 상업적 관계 강화에 나섰습니다.
2012년 3월, 야누코비치는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협정에 서명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우익 야당 지도자 율리아 티모셴코의 석방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이 합의는 이행되지 못했습니다. 2013년 내내 우크라이나의 산업 생산은 급격히 감소했고, 야누코비치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다시 유럽연합에 접근하게 되었습니다.
약속 철회와 실각: 2014년의 격변
마지막 순간까지 우크라이나가 EU 연합 협정을 체결할 것처럼 보였지만, 야누코비치는 약속을 철회했고 이로 인해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시위와 충돌이 폭발했습니다. 2014년 2월 21일 빅토르 야누코비치는 우크라이나에서 자취를 감췄고, 국가는 폭력과 대결의 분위기에 휩싸였습니다. 7일 후 그는 러시아 영토에서 다시 모습을 드러내 기자회견을 열고 '쿠데타 세력'을 비난했습니다.
현재 우크라이나는 친유럽 성향의 기관인 최고 라다(Verkhovna Rada)가 통치하고 있으며, 2014년 5월 25일 재선거를 실시할 예정이었습니다.
맺음말: 영토 분쟁의 열쇠는 '이해관계'에 있다
우크라이나 분쟁은 오랜 역사와 이 땅이 거쳐 온 여러 시대가 낳은 결과입니다. 우크라이나 영토 분쟁을 이해하는 열쇠는 슬라브 공화국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는 두 세력의 이해관계를 파악하는 데 있습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서방과의 화해를 달가워하지 않는 이유는 명확합니다. 그것은 곧 미국이 자국의 집 앞에 서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