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가라데 키드' 속 미야기 선생의 숨겨진 이야기
영화 가라데 키드를 본 사람이라면 미야기 선생이 제2차 세계대전 중 전선에서 싸우다 출산 중 사망한 아내를 회상하는 장면을 기억할 것이다. 놀라운 점은 그가 일본군이 아닌 미군으로 싸웠다는 사실이다. 1942년 일본계 미국인(니세이)이 강제 수용소에 수감되던 상황에서 이는 의아함을 자아낸다. 하지만 속편 뉴 가라데 키드에서 밝혀지듯, 미야기 선생은 니세이 자원병들로 편성된 제442연대 전투단(442nd Regimental Combat Team) 소속이었다. 이 부대는 미군 역사상 규모 대비 가장 많은 훈장을 받은 전설적인 부대가 된다.
진주만 공격과 일본계 미국인의 비극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직후,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2년 2월 19일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했다. 이로 인해 서부 해안에 거주하던 약 12만 명의 일본계 미국인(이중 3분의 2는 미국 태생 시민권자)이 집과 재산, 사업체를 잃고 강제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하와이는 인구의 4분의 1이 니세이였고 경제 기반이 무너질 우려로 대규모 수용은 면했지만, 하와이 방위군 소속 니세이 대원들은 해임되어 버시티 빅토리 볼런티어스(Varsity Victory Volunteers)라는 공병 부대로 재편성되었다.
제100보병대대 '원 푸카 푸카'의 탄생
하와이 주방위군 제298·299보병연대 소속 니세이 장병 약 1,300명은 전력 유지를 위해 잔류시켰으나, 이들을 따로 모아 하와이 임시대대(Hawaiian Provisional Battalion)를 편성했다. 1942년 6월 5일 위스콘신주 캠프 맥코이로 이동해 훈련을 받았고, 6월 15일 제100보병대대(100th Infantry Battalion)로 재편성되었다. 별칭은 '원 푸카 푸카(One Puka Puka)'. 훈련 중 얼어붙은 호수에서 민간인을 구조해 첫 메달을 받기도 했으며, '진주만을 기억하라(Remember Pearl Harbor)'를 부대 표어로 삼았다.
제442연대 전투단 결성과 충성심 논란
1943년 1월 미시시피주 캠프 셸비와 루이지애나주 캠프 클레이본에서 훈련을 마친 제100대대는, 대륙 출신 니세이 800여 명과 합류해 1943년 6월 제442연대 전투단을 탄생시켰다. 초대 연대장은 찰스 W. 펜스 대령. 모병 과정에서 '충성심 설문' 문항(미국에 충성하는가, 일본 천황에 대한 충성을 포기하는가)을 놓고 약 4분의 1이 이중 거부로 응답해 투옥되는 사태도 벌어졌으나, 이는 모욕적인 의심을 거부한 항거였다. 곧 하와이 출신을 중심으로 1만여 명의 지원자가 몰려들었다.
전장에서 증명된 '작은 강철 인간들'
당초 미군 수뇌부는 이들을 후방 경비나 특공 임무용 '포탄받이'로만 활용하려 했다. 이탈리아계·독일계 미국인은 수용되지 않고 전투에 투입된 것과 대조적이었다. 하지만 전황은 이들을 최전선으로 내몰았다. 제100대대는 1943년 9월 살레르노 상륙작전으로 실전 데뷔, 볼투르노 선에서 하루 만에 24km를 진격했다. 이어 몬테카시노 전투(구스타프 선)와 안치오 전투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며 '작은 강철 인간들(Little Iron Men)', 부대는 '퍼플 하트 대대(Purple Heart Battalion)'라는 별명을 얻었다.
로마 진격과 '잃어버린 대대' 구출
1944년 6월 제442연대 본대와 합류한 제100대대(제1대대로 편입)는 토스카나, 아르노 강을 거쳐 로마 방면으로 진격했다. 카스텔리나 마리티마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으나, 로마 입성 퍼레이드에는 참가하지 못했다. 9월에는 제7군 예하로 마르세유에 상륙, 론 강을 넘어 보주 산맥의 브뤼예르와 비퐁텐을 탈환했다. 이곳에서 텍사스주 방위군 제36사단 제141연대 1대대('잃어버린 대대')가 포위되자, 니세이 장병들은 '반자이!'를 외치며 총검 돌격으로 포위망을 뚫고 211명을 구출했다. 이 전투로 연대 병력은 800명 수준으로 줄었다.
다하우 수용소 해방과 고딕 선 돌파
제522야전포병대대는 지그프리트 선 돌파를 지원하다 독일 본토에서 다하우 강제수용소의 위성 캠프 카우페링 4(Kaufering IV Hurlach)를 해방, 3,000명의 생존자를 구했다. 이들은 독일 항복 후 나치 전범 검거 임무도 수행했다. 한편 제442연대는 이탈리아로 복귀해 아펜니노 산맥의 고딕 선(Gothic Line) 돌파전에 투입됐다. 제92보병사단(아프리카계), 브라질 원정군, 영·프 식민지군 등 다국적 부대와 함께 6개월 만에 방어선을 무너뜨리고 포 강 이북으로 독일군을 몰아냈다. 이것이 부대의 마지막 전투였다.
전무후무한 훈장 기록과 전후의 차가운 현실
제442연대 전투단은 2년도 안 되는 기간에 18,143개의 훈장을 받았다. 이 중 명예훈장(Medal of Honor) 21개, 수훈십자장 52개, 은성훈장 560개, 동성훈장 4,000개 이상, 퍼플 하트 9,486개에 달한다. 2011년에는 의회 명예 금메달(Congressional Gold Medal)이 추가 수여됐다. 전사·부상으로 인한 충원으로 총 1만 4,000여 명이 부대를 거쳐 갔다. 하와이 출신 상원의원 2명, 예술가, 교수, 스포츠 챔피언 등 다양한 인재가 포함됐다.
마지막 전투: 차별과의 싸움
전쟁 영웅으로 귀환했건만, 본토에서는 여전히 2등 시민 대우를 받았다. 식당 출입 거부, 고용 기피, 아메리칸 리전(American Legion) 입회 거절까지 이어졌다. 백인 장교들의 중재로 겨우 입회가 허용될 정도였다. 집과 농장은 타인 손에 넘어가 있었고, 많은 니세이는 GI 법안(Servicemen's Readjustment Act)을 이용해 재기했다. 1960년대에는 전문직 엘리트로 자리 잡았고, 하와이에서는 1959년 제50주 승격을 이끌어냈다. 부대 구호 '고 포 브로크(Go for Broke!)'처럼, 이들은 전장과 사회 모두에서 '올인'해 역사를 바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