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알렉산더 대왕은 어떻게 난공불락의 두로 섬을 반도로 만들었을까?

레바논 남부에 위치한 두로(티레, Tyre)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힙니다. 기원전 3000년경 시돈 인근의 정착민들이 처음 건설한 이 도시는 페니키아에서 이집트의 영향력이 약해지면서 정치적으로 독립했고, 이윽고 시돈을 제치고 페니키아 최대의 무역 중심지이자 항구로 부상하며 지중해 전역과 교역망을 형성했습니다.

난공불락이라 믿어졌던 섬 도시

오늘날 두로는 레바논 해안에서 약 2km 육지 쪽으로 뻗어 나온 작은 반도 위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부터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원래 두로는 본토에서 0.5km의 바다로 분리된 섬이었으며, 일부 구간 높이가 무려 45m에 달하는 성벽으로 사방이 둘러싸여 있어 요새나 다름없었습니다.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의 13년간 포위 공격마저 버텨낸 전례까지 있어, 당대 사람들은 두로를 '정복 불가능한 도시'로 여겼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어떻게 난공불락의 두로 섬을 반도로 만들었을까?

알렉산더, 두로로 향하다

기원전 333년 11월 이수스 전투에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를 격파한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2년 1월 페니키아에 도착했습니다. 두로를 제외한 모든 페니키아 도시는 전투조차 없이 마케도니아 군대에 항복했습니다.

알렉산더 역시 두로가 난공불락이라는 평가를 잘 알고 있었고, 해군 함대 없이는 이 도시를 정복하기 어렵다는 사실 또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두로 점령이 필수적이었는데, 두로가 그 지역에 남은 마지막 페르시아 항구였기 때문입니다.

협상 결렬, 그리고 분노

처음에 알렉산더는 지략으로 도시에 들어가려 했습니다. 그는 그리스인들이 신 헤라클레스와 동일시하는 티레의 신 멜카르트 고대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고 싶다고 두로 사람들에게 밝혔습니다. 그러나 두로 사람들은 속임수임을 간파하고 알렉산더의 입성을 거부했으며, 대신 본토에 있는 신전에서 제사를 지낼 것을 제안했습니다. 알렉산더가 계속 협상을 시도하자, 두로 사람들은 그의 사절들을 처형해 시체를 바다에 던져버렸습니다.

이에 분노한 알렉산더는 두로 강점을 결심합니다.

바다 위에 길을 놓다: 대역공 둑길 건설

알렉산더는 본토에서 헐어낸 건물 잔해를 이용해 좁은 수로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둑길(부두) 건설을 명령했습니다. 초반 수심은 약 2m 정도로 얕았기 때문에 공사는 빠르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러나 섬에 가까워질수록 수심은 깊어지고 파도는 거세졌으며, 두로 사람들은 성벽 위에서 화살과 투석을 퍼부으며 건설 인부들을 끊임없이 괴롭혔습니다.

알렉산더는 적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높이 50m에 달하는 목조 공성탑 두 개를 세우고 생가죽으로 덮었습니다. 다른 알렉산더의 공성탑들과 마찬가지로 이 탑들 역시 이동식 포병 플랫폼으로, 상단에 투석기를 장착하고 있었습니다. 탑을 둑길 끝에 배치함으로써 마케도니아군은 상부에서 반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어떻게 난공불락의 두로 섬을 반도로 만들었을까?

두로의 반격: 불타는 배

두로 사람들은 화선(火船)으로 맞섰습니다. 그들은 낡은 배에 역청, 유황 등 각종 연료를 싣고 돛대에는 기름 가마솥을 걸어 불을 붙인 뒤, 마케도니아군이 건설 중이던 부두에 충돌 좌초시켰습니다. 두 개의 공성탑은 화염에 휩싸였고, 다른 두로 선박들은 불을 끄려는 마케도니아 병사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퍼부어 물러나게 만들었습니다.

공성탑과 둑길 일부가 파괴된 것은 알렉산더에게 큰 좌절이었지만, 젊은 왕은 재건을 결심합니다. 그는 즉시 더 많은 공성탑을 수용할 수 있는 더 넓은 두 번째 부두 공사에 착수했지만, 속으로는 함대 없이는 포위 공격이 성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습니다.

함대 확보, 해상 대치

알렉산더는 배를 구하기 위해 시돈으로 향했습니다. 해안을 따라 진격하며 페르시아군에 복무하던 페니키아 선박과 선원들을 포획해 나갔습니다. 아라도스의 게로스트라토스와 비블로스의 아이넬 등 두 페니키아 왕은 전세가 어디로 기우는지 감지했는지 자발적으로 알렉산더에게 합류했고, 키프로스 왕들 역시 120척의 배를 추가로 보냈습니다. 이렇게 알렉산더는 곧 250척이 넘는 대함대를 확보하게 됩니다.

알렉산더가 함대를 이끌고 도착하자 두로 사람들은 항구를 봉쇄하고 내부에 바리케이드를 쳤습니다. 배들이 경계를 서는 동안 알렉산더는 부두 건설을 재개했습니다. 두로 사람들은 성벽에서 돌을 바다에 던져 장애물을 만들어 함대가 성벽에 근접하지 못하도록 저항했습니다. 알렉산더는 밧줄로 바위를 끌어올려 통로를 열라고 명령했고, 두로 사람들은 잠수부를 보내 포위선들의 닻줄을 끊었지만, 알렉산더는 닻줄을 쇠사슬로 교체하는 것으로 맞받았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은 어떻게 난공불락의 두로 섬을 반도로 만들었을까?

성벽 돌파, 도시의 몰락

마침내 둑길이 도시까지 닿으면서 알렉산더는 공성 엔진과 공성축을 성벽 앞으로 운반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남쪽 끝 성벽에서 약점을 발견한 그의 군대는 벽을 뚫고 진입, 수비대를 압도하며 빠르게 도시를 장악했습니다.

마케도니아군은 두로 주민들을 학살했고, 멜카르트 신전으로 피신한 소수만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전투에서 약 6,000명이 사망했고, 2,000명이 해변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남은 인구 약 30,000명—대부분 민간인—은 노예로 팔려나갔습니다. 한편 마케도니아군의 사망자는 약 400명에 그쳤습니다.

전쟁이 남긴 것: 섬이 반도가 되기까지

이 둑길은 해안 지형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포위전 이후 수세기에 걸쳐 둑길은 해류의 장애물이 되었고, 그 양쪽으로 퇴적물이 쌓이며 지협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4세기 말 두로가 비잔틴 제국의 영토가 되었을 무렵, 이 도시는 더 이상 섬이 아니라 넓은 반도로 본토와 이어져 있었습니다.

오늘날 이 모래 반도는 폭 약 0.5km에 달하며, 수백 채의 아파트가 들어선 고도로 도시화된 지역이 되었습니다. 남쪽 항구는 퇴적된 미사에 점차 묻혀 오래전 사라졌지만, 북쪽 항구는 지금도 어선과 유람선이 드나드는 살아있는 항구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Amusing Planet에 게재된 원문을 번역 허가를 받아 옮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