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축구를 비롯한 각종 프로 스포츠에서 선수들이 경제적 이익을 위해 팀을 옮기고, 때로는 영원한 라이벌의 유니폼을 입는 모습은 더 이상 낯선 일이 아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적'의 가장 오래된 기록은 약 2500년 전,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운동선수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이름은 아스틸로(Astilo). 이탈리아 반도 남부에 자리한 그리스 식민도시 크로토나(기원전 709년경 아카이아인들이 아에사로스 강 근처에 세운 도시) 출신이다.

크로토나는 기원전 540년경 피타고라스가 학교를 설립한 곳으로 유명하며, 올림픽 레슬링에서 6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밀로 데 크로토나(Milo de Crotona) 같은 올림픽 챔피언들을 배출한 육상 강국이기도 했다.
아스틸로 역시 4년마다 올림피아에서 열리는 올림픽에 크로토나를 대표해 출전했다. 올림픽 우승자 명단을 보면 그가 3회 연속 정상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제73회 올림피아드(기원전 488년)에서 처음 우승한 뒤, 제74회(기원전 484년)와 제75회(기원전 480년) 대회에서도 왕좌를 지켜냈다. 게다가 그 종목은 아무 종목이 아니라 당대 올림픽의 가장 권위 있는 경기인 스타디온이었다. 실제로 초기 14개 올림피아드(기원전 776년~724년)에는 이 종목 외에 다른 경기가 없었다.

스타디온은 경기장(stadion)의 이름에서 따온 육상 단거리 경주였다. 그리스어 '스타디온'은 헤라클레스가 걸음으로 잰 600피트에 해당하는 길이 단위에서 유래했다. 이 종목은 올림픽을 비롯한 범그리스 경기 전반에서 치러졌으며, 경기장 트랙 길이와 일치하는 거리에서 속도를 겨루는 경주였다. 다만 장소마다 거리는 조금씩 달랐다.
올림피아의 경우 그 거리는 192미터였다(델파이는 예컨대 178미터였다). 연구자 스티븐 게일로드 밀러(Stephen Gaylord Miller)에 따르면 이는 오늘날의 200m 경주에 해당한다. 흥미로운 점은 스타디온의 우승자 이름이 4년 주기의 올림피아드에 붙여졌다는 사실이다. 올림피아드란 한 대회와 다음 대회 사이의 4년 기간을 지칭했으므로, 우승자는 한 시대의 이름이 되는 영광을 누린 셈이다.

크로토나는 기원전 6~5세기에 이 종목을 사실상 지배한 도시였다. 기원전 588년부터 488년까지 열린 26개 올림피아드에서 크로토나 출신 우승자는 무려 11명에 달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고대 육상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기록이다. 비교해보면 같은 기간 스타디온에서 그다음으로 많은 우승을 거둔 엘리스와 코르키라는 각각 2명에 불과했다. 압도적인 격차다. 스트라본(Strabo) 역시 이러한 크로토나의 지배력을 언급한 바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크로토나의 성공이 철저한 스포츠 훈련과 함께 피타고라스의 영양 이론(이 도시가 피타고라스 학파의 본거지였다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본다.

실제로 올림픽은 각 종목 시작 시 선수가 자신이 대표하는 도시를 선언하고, 마지막에는 우승자의 도시를 공표하는 방식으로 도시 간 경쟁을 부추겼다.
그렇기 때문에 시라쿠사(시칠리아) 같은 일부 도시들은 타 도시 국가의 운동선수를 영입해 자신들을 대표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얻지 못한 승리와 명성을 손에 넣으려 했다. 문헌으로 확인되는 사례가 여럿 있지만, 앞서 말했듯 가장 이르고 선례가 된 사례 중 하나가 바로 아스틸로였다.

기원전 488년과 484년에 스타디온(그리고 경기장을 두 바퀴 돌며 달리는 디아울로, 즉 현재의 400m에 해당하는 종목에서도) 우승한 크로토나의 아스틸로스는 기원전 480년에도 두 종목 모두에서 다시 정상에 올랐다. 그러나 이번에는 심판단이 우승자를 선언하면서 "아스틸로 데 시라쿠사(Astilo de Siracusa)"라고 외쳤고, 고향 크로토나의 이름은 언급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간단히 말해,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히에론(Hieron)은 아스틸로스가 자신의 도시를 대표해 출전한다면 특별한 특권과 보상을 약속했고, 아스틸로스는 그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다.
동료 시민들의 반응은 다소 과장됐을 수 있지만, 그들이 이 경쟁을 얼마나 진지하게 여겼는지 잘 보여준다. 그들은 레기움의 피타고라스가 제작해 헤라 신전 곁, 다른 우승자들의 조각상과 함께 세워져 있던 아스틸로스의 동상을 파괴했을 뿐 아니라, 그의 집을 아예 감옥으로 바꿔버렸다.

그럼에도 아스틸로는 히에론이 약속한 삶을 만끽하며 시라쿠사에서 오랫동안 살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아스틸로의 선택을 단순한 '팀 변경'이 아니라고 보는 역사학자들도 있다. 그들은 아스틸로가 크로토나를 통치하던 피타고라스파 과두정치와 의견이 맞지 않았기에 자발적으로 시라쿠사로 떠났을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에 대해 H.W. 플레켓(H.W. Pleket)은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플레켓은 아스틸로가 고향을 등진 이유가 결국 경제적인 것이었다고 믿는다(오늘날 스포츠계에서 비슷한 사례를 서너 번쯤은 쉽게 떠올릴 수 있다). 크로토나는 시라쿠사가 지급한 금액, 혹은 아스틸로스가 요구한 몸값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이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