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식인 풍습으로 2만 명 이상 희생된 수이양(Suiyang) 포위전: 안사의 난 비극의 기록

장기간에 걸친 도시 포위전은 거의 예외 없이 기근과 전염병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초래하여, 수비군은 물론 때로는 포위군까지 괴멸시키며 생존을 위한 극단적인 행동을 낳곤 했습니다.

인류의 금기, 식인 풍습의 역사적 사례들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한 금기 중 하나인 식인 풍습(Cannibalism)은 제1차 십자군 전쟁 당시 마라트(Ma'arrat al-Nu'man) 점령 때 자행된 바 있으며, 중국의 안사의 난(安史之亂) 시기 수이양 전투(睢陽之戰)에서도 충격적인 사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식인 풍습으로 2만 명 이상 희생된 수이양(Suiyang) 포위전: 안사의 난 비극의 기록

당나라의 번영과 몰락, 안사의 난 발발

이 반란은 8세기 후반, 당나라(唐) 시대에 일어났습니다.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는 국경 확장, 기병 궁수 도입, 불교 공인, 인쇄술 발전 등으로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이백, 두보 같은 시인들이 활약한 문학과 예술의 황금기이자, 과거 제도를 통한 효율적인 관료 체제가 정착되어 백성의 생활 수준이 비약적으로 향상된 시기였습니다. 특히 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치세는 그 정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융성 뒤에는 쇠퇴가 따르는 법. 8세기 중반 군사력 약화와 경제 불안정이 찾아오자, 지방 호족들이 토지를 독점하고 세력을 키워 중앙 정권을 위협했습니다.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군에게 패배하고 현종이 아들 숙종에게 양위하는 혼란을 틈타, 소그디아와 투르크 혼혈 출신의 절도사 안녹산(安祿山)이 756년 황제를 칭하며 동도 장안(長安)을 점령하고 연(燕)나라를 세웠습니다.

식인 풍습으로 2만 명 이상 희생된 수이양(Suiyang) 포위전: 안사의 난 비극의 기록

전성기를 구가하던 안녹산은 이듬해 757년 1월, 자신의 아들 안경서(安慶緒)에게 암살당합니다. 하지만 안경서는 당나라에 충성하기 위해 아버지를 죽인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부친의 자리를 이어 싸움을 계속하기로 하고, 장수 음자제(尹子奇)에게 양자강 이남 지역 장악의 열쇠인 수이양(睢陽) 공략을 명령했습니다.

식인 풍습으로 2만 명 이상 희생된 수이양(Suiyang) 포위전: 안사의 난 비극의 기록

절대적 열세, 7천 vs 13만의 사투

음자제와 또 다른 반군 장수 양조종(楊朝宗)의 연합군 13만 대군이 수이양을 포위했습니다. 수이양 태수 허원(許遠)은 영구 전투(永丘之戰)에서 공을 세운 명장 장훈(張巡)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장훈은 고작 7천 병력을 이끌고 합류했습니다. 장훈이 방어를 총괄하고, 행정가인 허원이 군수 보급을 맡았습니다.

연군은 완강한 저항에 부딪혔습니다. 장훈은 야간에 북을 울려 가짜 공격을 알리며 적의 수면을 방해하는 등 기상전술을 펼쳤습니다. 적이 북소리에 익숙해져 방심할 때 기습을 가해 타격을 입혔으나, 압도적 병력 차이를 극복하긴 어려웠습니다. 장훈은 적장 음자제를 제거해 사기를 꺾기로 결심합니다.

성벽에서 적장을 식별하기 어렵자, 장훈은 궁수들에게 화살 대신 풀(억새)을 쏘게 했습니다. 놀란 적병들이 이상한 투사체를 주워 장수에게 보여주는 바람에 음자제의 위치가 노출되었고, 이어진 화살 세례에 왼쪽 눈을 맞아 한동안 기절했습니다. 이 대담한 전술과 2주 만에 2만 명의 병사를 잃은 연군은 잠시 퇴각해 재정비에 들어갔습니다.

외면당한 구원 요청, 그리고 지옥의 문이 열리다

허원은 주변 고을에 1년 치 식량을 비축해달라 요청했으나, 지방 관리들은 반군에 동조하거나 보복을 두려워해, 혹은 장훈을 시기해 협조를 거부했습니다. 두 달 뒤 연군이 재공격해 왔을 때, 수이양엔 식량이 전혀 없었습니다.

식인 풍습으로 2만 명 이상 희생된 수이양(Suiyang) 포위전: 안사의 난 비극의 기록

여름이 되자 배급은 쌀 한 줌에 차 잎, 나무껍질, 종이를 섞은 죽으로 줄어들었고, 곧 풀뿌리와 짐승(말, 새, 쥐), 곤충까지 동이 났습니다. 음자제는 성벽을 무너뜨리거나 수레로 성문을 뽑아내려 시도했으나 모두 격퇴당했습니다.

한 달 후 비상식량마저 떨어지자, 사절을 보내 구원병과 식량을 요청했습니다. 장수 남계운(南霽雲)이 임회(臨淮)에 도달했으나 태수는 비협조적이었습니다. 남계운이 분개하며 손가락을 잘라(다른 설엔 깨물어) 결의를 보이자 태수가 마음을 돌려 3천 병사를 내주었으나, 포위망을 뚫고 들어온 건 1천 명 남짓이었습니다. 이들은 전사자 보충엔 도움이 됐지만, 먹일 입만 천 명 더 늘린 꼴이었습니다. 수비군은 황제의 구원만 기다리며 버텼습니다.

식인 풍습으로 2만 명 이상 희생된 수이양(Suiyang) 포위전: 안사의 난 비극의 기록

기록된 공포: 2~3만 명의 인육, "필요악"으로 받아들여진 비극

더 이상 입에 넣을 것이 없던 그때, 당사(唐史) 등 중국 사서엔 끔찍한 기록이 남습니다.

"백성들이 자식을 바꿔 먹었고 시체를 삶아 먹었다. 장훈은 자신의 첩을 병사들 앞에서 죽여 고기를 먹게 했고, 병사들이 꺼리자 강제로 먹였다. 이후 하인들과 비전투원인 노인, 여자, 아이들까지 차례로 잡아먹었다."

사서에 기록된 2만~3만 명이란 수치는 전사자나 아사자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이나, 놀랍게도 이 끔찍한 행위가 '필요악(必要惡)'으로 받아들여져 누구도 불평하거나 항복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함락과 희생, 역사를 바꾼 10개월의 저항

결국 수이양은 그해 10월 함락되었습니다. 연군이 성에 들어섰을 때 살아남은 수비군은 불과 400명, 모두 탈진해 저항할 힘조차 없었습니다. 음자제는 허원과 장훈의 충절을 높이 사 항복을 권유했으나, 단호히 거절당하자 이들을 비롯한 장수들을 처형했습니다.

이 승리로 연나라는 강남 지역을 2년간 지배했지만, 수이양의 10개월 저항이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숙종은 병력을 정비해 반격할 수 있었습니다. 결국 안사의 난은 763년 완전히 진압되었습니다. 수이양의 비극적 희생이 당나라 왕조를 구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