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게르만족의 일파, 서고트족
서고트족(Visigoths)은 고트족의 한 갈래로, 기원전 600년에서 기원전 300년 사이 스칸디나비아반도에서 오데르 강과 비스툴라 강 사이 지역으로 이주한 동게르만 부족에 속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서고트족이 테르빙기(Thervingi)와 동일한 민족이라고 보는데, 6세기의 역사가 요르다네스(Jordanes)는 알라리크 1세부터 알라리크 2세에 이르는 왕들이 테르빙기의 판관 아타나리크(Athanaric)의 후계자라고 기술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문제는 오랫동안 논쟁거리로 남아 있다.
헤르비히 볼프람(Herwig Wolfram)은 베시(Vesi)가 부족 스스로를 가리키던 명칭이며, 테르빙기(Tervingi)는 단순한 지리적 표지였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보면 훈족의 침입으로 서고트족이 옮겨간 뒤 '테르빙기'라는 용어가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된 이유도 자연스럽게 설명된다.

어느 쪽이든 서고트족이 이탈리아 반도를 침공해 410년 로마를 약탈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이후 그들은 로마 제국의 포에데라티(foederati, 동맹부족)로서 남갈리아에 정착했고, 507년 프랑크족에게 패배한 뒤 415년부터 부분적으로 장악하고 있던 히스파니아로 최종적으로 옮겨가 톨레도를 중심으로 하는 서고트 왕국을 세웠다.
고트인들의 언어, 구티스크 라즈다
서고트족은 4세기 무렵, 아마도 376년의 침입과 378년 아드리아노플 전투 승리 이전에 로마 제국과 접촉하게 되었다. 그들이 사용한 언어, 즉 우리가 고트어(Gothic)라고 부르는 언어는 당시 화자들에게 구티스크 라즈다(gutisko razda)로 불렸으며, 서고트족과 동고트족 모두가 사용했다.

이 언어를 알 수 있는 것은, 문자 기록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부르군트어나 반달어 같은 다른 게르만 언어들과 달리 고트어의 단편들이 오늘날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가장 오래된 것은 4세기 고트족 주교 울필라스(Ulfilas)가 그리스어에서 번역한 성경으로, 코덱스 아르겐테우스(Codex Argenteus), 즉 '은성서(銀聖書)'로 보존되어 있다. 이것은 4세기 원본의 6세기 필사본으로, 스웨덴 웁살라 대학교 도서관에 전시되어 있다.
은성서와 밀란의 코덱스 암브로시아누스(Codex Ambrosianus)에 담긴 스케이린스(Skeireins, 고트어로 '해설'이라는 뜻) 등 후대 문서들은 울필라스가 만든 것으로 여겨지는 문자로 쓰였다. 이 알파벳은 그리스 문자를 바탕으로 25개 글자를 구성하고, 여기에 룬 문자와 라틴 문자의 요소를 더한 것이다.
쇠퇴와 마지막 화자들
동고트족이 비잔틴(동로마)의 정복으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소멸한 뒤, 고트어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족에게만 남았고 6세기 중반부터 쇠퇴하기 시작했다. 589년 서고트족의 가톨릭 개종은 이 언어가 점차 버려지는 주요 계기 가운데 하나였다. 그럼에도 고트어는 8세기까지, 아마도 이슬람 침입 시기까지 구어로 사용되었다.

한편 고트어의 방언 하나는 크림 반도에서 18세기 말까지 살아남았다. 9세기 전반에 활동하며 라이헤나우 수도원의 원장을 지낸 수사 발라프리도 스트라보(Walafrido Strabo)가 이를 언급했고, 1562년 플랑드르 출신 외교관 오기에 게슬랭 드 뷔스베크(Ogier Ghiselin de Busbecq)가 오스만 제국 주재 대사로 있을 때 쓴 편지에는 크림 고트어 단어 80개 목록과 노래 한 곡이 실려 있다.

고트어는 문헌 기록이 남아 있는 게르만 언어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파생 언어를 남기지 않은 채 소멸했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이슬람 정복 이후 남은 서고트인들이 여러 왕국(알안달루스 포함)에서 형성되던 혼합 민족 속으로 녹아들면서 자신들의 언어를 새로운 로망스어군 언어들로 대체해 갔다.
죽은 언어, 그러나 사라지지 않은 언어
고트어가 사어(死語)가 되었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고트어판 위키피디아도 존재하며, J.R.R. 톨킨은 1936년 Songs for the Philologists에 고트어 시 Bagme Bloma(나무들의 꽃)를 발표하기도 했다. 최근에는 2015년, 데이비드 칼턴(David Carlton)이 옮긴 고트어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인 Balþos Gadedeis Aþalhaidais in Sildaleikalanda가 등장했다.
고트어를 배우고 싶은 사람에게도 자료는 넉넉하다. 조지프 라이트(Joseph Wright)가 1910년에 저술한 게르만어 문법(Grammar of the Gothic Language)을 비롯해 유튜브의 무료 강의까지 온라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고트어는 어떻게 들렸을까?
울필라스가 당대 그리스어의 표기 관습을 그대로 따랐고, 그리스어는 문헌이 잘 남아 있기 때문에, 은성서에 나오는 비그리스계 인명들의 표기를 참고하는 등 비교 음성학을 통해 고트어의 발음을 상당 부분 재구성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고트어는 통상적인 인도유럽어의 음높이 액센트—단어의 특정 음절에 붙는 방식— 대신 운율적(prosodic), 즉 문장 강세를 사용했다. 일반적으로 단순어의 강세는 첫 음절에 고정되었다.
복합어의 경우 두 번째 요소가 명사라면 첫 번째 단어의 첫 음절에 강세가 놓였고, 동사라면 동사의 첫 음절에 강세가 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