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바렌느 도주 사건 – 루이 16세의 탈출과 프랑스 혁명의 전환점

프랑스 혁명의 배경

1789년 5월, 루이 16세는 파탄 직전에 몰린 프랑스의 재정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삼부회 대표들을 소집했습니다. 같은 해 6월 17일, 제3신분은 스스로를 국민의회로 선언하며 새로운 정치 질서를 알렸고, 7월 14일에는 파리 시민들이 전제 왕권의 상징인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습니다. 이어 8월 26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이 채택되며 자유와 평등의 원칙이 선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에도 군주제 자체는 정치 체제로 유지되었습니다. 다만 왕권은 더 이상 절대적이지 않으며, 의회를 중심으로 운영되는 입헌군주제로 변모해 갔습니다.

도주 계획의 배경과 주요 인물

혁명 발발 이후 왕의 측근들, 예컨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나 스페인 대사 등은 왕에게 파리를 떠나 지방으로 피신하여 구체제(앙시앵 레짐) 복귀를 준비할 것을 권유했습니다. 그러나 루이 16세는 처음에는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주요 인물

  • 루이 16세 – 도주를 결심한 프랑스의 왕
  • 악셀 폰 페르센(Axel de Fersen) – 왕가와 가까웠던 스웨덴 출신 귀족으로, 도주 계획을 입안

바렌느 도주의 경과

1791년 4월 2일 미라보가 사망하면서 왕은 정치적으로 크게 고립되었다고 느꼈습니다. 4월 18일에는 왕과 왕가가 생클루로 향하던 마차가 시위대에 의해 가로막히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이 사건 이후 왕은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합니다. 악셀 폰 페르센은 도주 계획을 세웠는데, 그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왕은 벨기에 국경 근처 로렌 지방의 몽메디(Montmédy)에 도달해야 했습니다. 그곳에는 왕에게 우호적인 부대가 주둔하고 있었고, 왕이 무사히 도착하면 유럽 열강이 개입하여 프랑스에 군주제를 회복시켜 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6월 20일 밤, 왕과 왕비, 그리고 자녀들은 튈르리 궁을 빠져나갔습니다. 파리 탈출 자체는 문제없이 이루어졌지만, 이후 상황은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마차를 목적지까지 호위하기로 되어 있던 부대가 약속된 집결지에 나타나지 않은 것입니다.

밤 11시경 바렌느(Varennes)에 도착한 왕은 결국 신원을 알아보고 말았습니다. 곧바로 마을의 애국파들과 국민방위군에 경보가 울려 퍼졌습니다. 다음 날 아침, 왕가는 파리로 돌려 보내졌습니다. 수도에 가까워질수록 마차를 따르는 군중은 점점 더 많아지고 격해져 갔습니다.

도주 사건의 결과

  • 파리 시민들은 왕의 귀환에 분노했습니다. 국민의회에서는 왕이 도주 전에 남겨 두었던 『왕이 모든 프랑스인에게 보내는 선언문』이 낭독되었습니다. 이 선언문에서 루이 16세는 의회의 법률을 받아들인 것이 자유로운 의사가 아니라 강압에 의한 것임을 밝혔으며, 이 선언문은 파리 거리 곳곳에 게시되었습니다.
  • 주로 군주주의적이었던 여론은 바렌느 사건 이후 왕의 진정성을 의심하게 되었고, 점차 공화주의 사상으로 기울었습니다. 왕가의 마차가 파리에 들어설 때, 사람들은 루이 15세 동상의 눈에 가리개를 씌웠는데, 이는 군주제의 '실명'을 상징하는 행위였습니다.
  • 1791년 7월 17일, 공화파는 헌법제정의회에 루이 16세의 폐위를 선언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고 이를 샹드마르의 '조국의 제단'에 게시했습니다. 국민방위군이 집회를 무력 진압하면서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습니다(샹드마르 사건). 같은 해 9월 14일 왕은 새 헌법에 대한 서약을 했으나, 1년 뒤 결국 폐위되고 말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