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신성로마제국 최악의 참사 중 하나, 1184년 에르푸르트 변소 붕괴 사고

사고로 인한 죽음은 언제나 비극적이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굴욕적이고 참혹한 방식으로 기록된 사건이 있다. 중세 신성로마제국에서 일어난 에르푸르트 변소 붕괴 사고가 바로 그것이다. 1184년 7월 26일, 하인리히 6세의 궁정 인사 수십 명이 건물 바닥 붕괴로 추락했고, 그중 다수는 분뇨 저장조에 빠져 익사하는 끔찍한 최후를 맞았다.

젊은 왕 하인리히 6세와 에르푸르트 행차의 배경

1165년 네이메헌에서 태어난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하인리히는 프리드리히 1세 바르바로사의 아들이었다. 네 살에 로마왕으로 선출된 그는 어린 나이부터 부황의 원정에 동행하며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1176년 롬바르디아 동맹과의 전쟁, 사자공 하인리히 반란 진압 등 구엘프파와 기벨린파의 투쟁 속에서 정치적 수완을 익혔다. 부황이 제3차 십자군에 나서자 제국 통치를 대리했고, 라틴어와 법학 교육을 받으며 민네장어 (음유시인) 프리드리히 폰 하우젠에게 시를 배우기도 했다. 1186년 시칠리아 공주 콘스탄체와 결혼하며 노르만 왕가의 상속권도 확보했다.

신성로마제국 최악의 참사 중 하나, 1184년 에르푸르트 변소 붕괴 사고
하인리히 6세 (1165-1197)

튀링엔 분쟁 중재를 위한 제국 의회

비극이 일어난 1184년 여름, 하인리히는 폴란드 원정 중 튀링엔 공국 에르푸르트에 머물렀다. 사촌인 튀링엔 방백 란트그라프 루트비히 3세와 마인츠 대주교 콘라트 폰 비텔스바흐 사이의 영지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서였다. 사자공 하인리히가 실각한 뒤 권력 공백 속에서, 대주교가 1180년 튀링엔 국경 인근 하일리겐부르크에 성을 축성하자 루트비히 3세가 도발로 받아들여 충돌이 격화된 상황이었다.

신성로마제국 최악의 참사 중 하나, 1184년 에르푸르트 변소 붕괴 사고
중세 에르푸르트 전경 (후대 판화)

페테르스키르헤 사제관 2층에서의 참변

제국 의회(Hoftag)는 페테르스베르크 성채 내 페테르스키르헤(성 베드로 교회) 부속 사제관 2층에서 열렸다. 하인리히의 수행원과 양측 대표단, 그리고 편을 든 여러 영주까지 100명 이상이 좁은 공간에 모였다. 인원을 지탱하지 못한 썩은 바닥 보가 무너졌고, 1층을 뚫고 지하의 변소와 거대한 정화조로 사람들이 쏟아져 내렸다.

신성로마제국 최악의 참사 중 하나, 1184년 에르푸르트 변소 붕괴 사고
중세 건물의 아보르테커 (돌출형 변소) 및 정화조 구조 예시

건물 외벽에 돌출된 아보르테커(배설물이 아래로 떨어지는 구조의 화장실) 시설과 1층 변소도 연쇄 붕괴했다. 중력에 이끌린 귀족들은 수년간 쌓인 분뇨 더미 속으로 떨어졌고, 잔해 더미에 깔리거나 분뇨에 질식해 사망했다. 기괴함과 비극이 공존하는 지옥도였다.

사망자 명단과 생존자들

당대 사료에 따르면 60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치겐하인 백작 고츠마르 3세, 베링거 1세 폰 멜디겐, 그라프 (백작) 프리드리히 폰 아빈베르크, 그라프 하인리히 폰 슈바르츠부르크, 부르크그라프 (성주) 프리드리히 폰 키르히베르크, 부르크그라프 부르하르트 폰 데어 바르트부르크 등 고위 귀족들이 변변찮은 최후를 맞았다.

반면 루트비히 3세는 정화조에 빠졌다가 기적적으로 탈출해 감염증을 이겨냈고, 대주교 콘라트는 창틀 스테인드글라스 프레임을 잡고 버티다 구조됐다. 하인리히 6세 역시 창가에 앉아 있다가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화를 면했다. 그는 사고 직후 즉시 에르푸르트를 떠났다.

신성로마제국 최악의 참사 중 하나, 1184년 에르푸르트 변소 붕괴 사고
에르푸르트 성 베드로 연대기 필사본

연대기의 우회적 기록과 역설적 추측

에르푸르트 성 베드로 연대기는 참상의 세부 묘사를 피한 채 "왕은 창가에 앉아 화를 면했고, 불운한 이들은 깊은 구덩이에 빠져 생을 마감했다"고 우회적으로 기록했다. 이는 역설적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왕이 붕괴 순간 마침 외벽 쪽 벽돌 변소에 앉아 있었기에 추락을 면했을 가능성이다. 자신의 생리적 욕구가 생사의 경계를 가른 아이러니, 그리고 신하들이 쌓아 올린 분뇨가 그들의 생명을 앗아간 역설적 결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