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922년 이즈미르 대학살, 화물을 바다에 버리고 823명의 난민을 구한 일본 상선 '도케이마루'

박해받는 사람들이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순간, 상선이 적재한 화물을 통째로 바다에 버려 배에 자리를 만들고 그들을 태웠다는 사실은 선장과 승무원들의 이름을 역사에 금자로 새겨야 마땅한 영웅적 행위입니다. 그러나 1922년 이즈미르 항에서 실제로 일어난 이 사건은, 배가 서구 국가의 깃발을 달고 있지 않았기 때문일까요, 오랫동안 잊혀져 왔습니다. 언론인들과 작가들의 끈질긴 조사 끝에야 배의 이름이 밝혀졌는데, 바로 일본 상선 도케이마루(Tokei Maru)였습니다.

아르메니아인 박해의 역사

1915년 4월 24일, 제1차 세계대전 한가운데서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에서 아르메니아 시민들에 대한 대규모 체포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체포 명단은 점차 수백 명으로 불어났고, 결국 아르메니아 공동체 전체에 대한 박해와 추방으로 이어졌습니다. 양측의 갈등은 오래된 것이었습니다. 19세기 후반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가 잇달아 독립하면서 영토를 잃은 오스만 제국으로서는, 독립 국가 건설을 열망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의 강렬한 민족주의 기운을 결코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갈등의 결과가 바로 추진자인 술탄 압둘하미드 2세의 이름을 딴 '하미디언 학살(Hamidian Massacres)'로, 아르메니아인 수십만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이 만행은 1909년 아다나 학살로 되풀이되었고, 이때도 거의 3만 명 가까이가 희생되었습니다. 비록 그 무렵 '붉은 술탄'(흘린 피를 빗댄 별명)이라 불린 압둘하미드 2세는 이미 실각하고, 개혁 성향의 민족주의 세력인 청년 튀르크(Young Turks)가 권력을 잡은 뒤였지만 말입니다.

대추방, 비극의 시작

1914년 엔베르 파샤는 오스만 제국을 동맹국 진영에 가담시켜 세계대전에 끌어들였습니다. 처음에는 군에 편입된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했지만, 카르스와 반 등 내륙 도시에서 이 공동체가 무슬림들과 벌인 소요 사태와, 러시아군에게 입은 사리카미슈의 참패가 반란으로 해석되면서 정부는 아르메니아인들을 아나톨리아 남서부로 집단 추방하기로 결정합니다.

이 강제 이주는 1915년 4월 24일 시작되어 1923년 새로운 튀르키예 공화국이 선포될 때까지 수년간 지속되었습니다.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참혹한 조건 속에서 고향을 떠났고 절반가량은 이주 도중에 사망하거나 고의적인 학살로 희생되었습니다. 사망자 수는 언제나처럼 출처에 따라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의도적인 계획이 아니었다며 집단살해(genocide) 규정을 끝내 부인해 온 튀르키예 측은 20만~60만 명으로 추산하지만, 다른 측은 최대 150만 명까지 주장합니다.

1922년 이즈미르 대학살, 화물을 바다에 버리고 823명의 난민을 구한 일본 상선  도케이마루

이즈미르 함락과 항구의 지옥

바로 이런 배경 속에서 이즈미르의 비극이 펼쳐졌습니다. 1919년 그리스가 점령한 이 도시에서는 튀르크 주민들 사이에 민족주의 열기가 끓어오르고 있었습니다. 1922년 9월 9일 튀르크 군대가 도시를 점령하고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에 대한 학살을 시작하자, 수만 명의 사람들이 목숨을 걸고 항구로 몰려들어 배에 오를 길을 찾았습니다. 아르메니아인 거리에서 시작된 화재는 나흘 동안 타올랐고, 결국 도시 전체를 잿더미로 만들었습니다.

불행한 사람들은 인파에 짓밟혀 죽거나, 닻을 내린 약 20척의 배 중 하나라도 붙잡으려고 바다에 몸을 던지다 익사했습니다. 항구에는 프랑스 증기선 2척, 이탈리아선 2척, 미국선 1척이 있었지만, 선원들은 경악하면서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하는 모습으로 이 처참한 광경을 지켜볼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난민 구출을 위해 와 있었지만, 서류를 요구하지 않고 받아들인 것은 미국선뿐이었고 나머지는 여권을 소지한 사람만 태워주었습니다.

도케이마루의 결단

바로 그때, 도케이마루의 선장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닫고 전례 없는 명령을 내립니다. 피레우스를 출발해 헤라클리온과 크레타에 기항한 뒤 알렉산드리아로 향하던 이 4천 톤급 일본 상선은 방금 값비싼 비단과 도자기를 가득 실은 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선장은 화물을 전부 바다에 버리라고 명령한 것입니다. 탁한 항구 물밑으로 막대한 재산이 가라앉았지만, 그 덕분에 배에는 수백 명의 난민을 수용할 충분한 공간이 생겼고, 이들은 그렇게 목숨을 구했습니다. 도케이마루는 동지중해를 건너 이들을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에 무사히 내려주었습니다. 구조된 행운아는 823명이었습니다.

1922년 이즈미르 대학살, 화물을 바다에 버리고 823명의 난민을 구한 일본 상선  도케이마루

일본선의 이 활약은 더욱 고결한데, 튀르크 측의 압박까지 견뎌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튀르크 측은 병사들을 태운 보트 여러 척을 배로 보내 난민들의 인도를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선장은 이를 거부하고, 어떤 무력 행위든 일본 영토에 대한 공격(법적으로 실제로 그랬습니다)으로 간주하겠으며, 자국의 이스탄불 고등판무관에게 통보해 정부에 정식 항의하겠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위협은 효과가 있었고 병사들은 물러섰습니다. 그들은 일본인의 말에 어느 정도 허풍이 섞여 있음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경고에 언급된 그 관리는 우치다 백작으로, 당시 국내의 실권자 무스타파 케말 지지 세력에게 공공연하게 동정적이었던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즈미르 국제 칼리지에서 근무하던 버지(Birge) 교수의 부인을 비롯한 목격자들, 생존자들의 증언, 미국 영사관과 해군 당국의 기록, 그리고 당시 그리스 언론의 기사들이 이 훌륭한 일본인들의 활약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잊혀서는 안 될 기억

2016년 여름, 아테네는 이즈미르에서 벌어진 구출 활동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일본의 니시바야시 마스오(Nishibayashi Masuo) 대사에게 기념패를 헌정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이 영웅적 행위의 주인공인 선장의 신상은 여전히 미궁 속에 있습니다. 당대 그리스 신문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의 이름이 '루(Lou)'였다는 사실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