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비잔틴 제국과 아랍 제국: 동로마의 천년 번영과 이슬람의 확장

서유럽에서 로마 제국이 게르만족의 침입과 새로운 왕국들의 성립으로 무너져 가던 시기, 로마 제국의 동부에서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습니다.

4세기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두 아들이 로마 제국을 동서로 나누어 상속받은 이후,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한 동부 지역은 눈부신 번영을 누렸습니다. 천 년에 걸쳐 로마, 그리스, 동방의 문화가 융합되어 독창적인 특징을 지닌 문명이 꽃피웠으며, 그 가장 위대한 업적은 예술과 문화 분야에서 빛을 발했습니다.

같은 시기 아라비아 반도에서는 사막 지대에 살던 유목민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로 팽창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가르침에 이끌린 그들은 이베리아 반도까지 진출하여, 그곳 주민들의 건축과 언어에 뚜렷한 흔적을 남겼습니다.

동로마 제국: 비잔틴

로마 제국의 동부는 '비잔틴 제국'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수도가 비잔티움이라 불리던 고대 그리스 식민 도시였기 때문입니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때 이 도시는 대대적으로 개축되어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며, 오늘날에는 튀르키예 영토 안의 이스탄불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 위치한 비잔티움의 지리적 조건은 활발한 상업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비단, 향신료, 상아 같은 극동의 물산이 현지 생산품(직물, 보석, 정교한 공예품)과 함께 서유럽에 재판매되었고, 이러한 왕성한 교역은 각국의 상인들을 이 도시로 끌어모았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거대한 인구를 수용하는 '동방의 수도'가 되었지만, 비잔틴 제국에는 니케아, 안티오키아, 테살로니카, 알렉산드리아 같은 다른 대도시들도 있었습니다. 이들 도시 일부는 비옥한 평야에 자리하여 밀이나 포도주용 포도 같은 중요한 농산물을 생산했습니다.

정치 조직의 최고 정점은 황제였습니다. 황제는 수많은 관료들의 보조를 받아 군대를 지휘하고, 스스로를 '정교회(Orthodox)'라 칭하는 교회를 이끌었습니다. 따라서 황제는 매우 강력한 존재였으며, 신의 지상 대표자로 여겨져 머리에 후광을 두른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습니다. 지역 교회가 황제의 권위 아래 종속되면서, 교황에게 복종하던 서방 교회와의 거리는 점점 벌어졌고, 마침내 양측의 관계는 완전히 단절되었습니다. 이렇게 분리된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는 오늘날까지 존속하고 있습니다.

부유한 귀족 외에도 상인과 장인들은 특혜를 누리는 경제적 지위를 향유했으나, 농민들은 노예에 가까운 농노제와 가난 속에서 살아갔습니다.

유스티니아누스의 시대

527년부터 565년까지 통치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재위 기간은 콘스탄티노플과 제국 전체가 최고의 영광을 누린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 북아프리카, 이탈리아 반도, 이베리아 반도의 일부가 정복되었는데, 이는 옛 로마 제국의 영토였다가 야만족의 손에 넘어갔던 지역들이었습니다.

로마법의 전통을 계승하려 했던 유스티니아누스는 제국의 고대 법률을 『민법대전(Corpus Juris Civilis)』, 즉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으로 집대성했습니다. 이 법전은 다음의 네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 법전(Code): 하드리아누스 황제(117년) 이래의 로마 법률 모음
  • 학설집(Digest): 법전의 법률에 대한 로마 법학자들의 해설
  • 법학강요(Institutes): 로마법을 요약·연구한 법학도용 교재
  • 신칙령(Novels): 유스티니아누스가 반포한 새로운 법률집

유스티니아누스의 통치 기간에는 로마 건축의 웅장함과 동양적 장식의 화려함을 결합한 성 소피아 대성당이 세워졌습니다. 콘스탄티노플에는 호화로운 궁전들과 거대한 경마장(히포드롬)도 들어섰으며, 장식 요소로는 웅장한 모자이크와 회화가 사용되었습니다.

그 규모와 부로 인해 비잔틴 제국은 서방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샤를마뉴 대제의 통치기에 많은 학자, 예술가, 교사가 이 동방 지역에서 건너왔다는 사실이 좋은 예입니다.

또한 비잔틴의 종교는 야만족, 특히 슬라브족에 대한 복음 전파 사업을 통해 유럽 일부 지역에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 결과 동유럽의 상당수 국가들이 오늘날까지 정교회를 따르고 있습니다. 러시아인들이 사용하는 키릴 문자 역시 비잔틴 출신 선교사 키릴(키릴로스)이 그리스 문자를 변형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 이후 비잔틴 제국은 서서히 쇠퇴하여 영토 대부분을 야만족과 아랍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럼에도 제국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투르크에 함락될 때까지 명맥을 유지했습니다.

비잔틴 미술의 특징

그리스 예술가의 정확한 비례 감각과 동양인의 섬세함이 한 작품 안에서 융합된 것이 곧 비잔틴 미술의 본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비잔틴 미술은 고대의 요소들을 되살려, 콘스탄티노플을 기반으로 한 더욱 동방화된 제국의 환경에 맞게 재해석했습니다.

비잔틴인의 예술 표현은 그들의 이상과 신앙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한편 비잔틴 조각이 표현력이 결여된 채 부차적인 위치로 밀려난 것은 인간 형상 숭배를 금지한 종교적 규정 때문으로 설명됩니다.

반면 종교 건축은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으며, 비잔틴 예술가들이 영감을 얻은 두 원천이 뚜렷이 드러납니다. 고대의 유산은 정연한 건축 비례에 대한 선호에서 나타나는데, 일부 거대한 작품도 있었지만 측량과 규모 면에서 질서를 중시했습니다.

교회 건축은 직사각형(라틴식) 또는 십자형(기독교에서 파생)의 두 가지 모델을 따랐습니다. 동방의 영향은 실내의 풍부한 장식과 종교 건축의 위대한 혁신인 돔 지붕, 즉 네 개의 큰 아치가 받치는 형태에서 표현되었습니다.

건물 외관을 지배했던 소박함은 풍부한 실내 장식과 대비를 이루었습니다. 벽, 천장, 돔은 알록달록한 모자이크로 덮였는데, 이것이 동방이 비잔틴 미술에 남긴 근본적인 공헌입니다. 모자이크는 잘 다룰 수 있는 점착 재료 위에 작은 색색의 큐브를 하나씩 붙이고, 좁은 금과 은의 줄을 사이사이 배치하여 만들었습니다. 멀리서 바라보면 전체가 하나의 형상을 이루는데, 대개 성경 장면을 묘사하며 인물들은 더 경건해 보이도록 변형되어 표현됩니다.

황제와 황후 역시 성인처럼 묘사되어 머리에 후광이 그려졌습니다.

비잔틴 미술은 광범위한 지역을 아울렀으며, 오늘날에도 동유럽의 정교회 교회들(불가리아, 세르비아, 튀르키예 등)은 물론 이탈리아의 라벤나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중세 유럽 속의 비잔틴

비잔틴 제국은 서로마의 멸망 이후에도 천 년 가까이 로마의 명맥을 이어간 '중세의 보고'였습니다. 동시에 아랍 제국의 부상은 지중해 세계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고, 이 두 세력의 충돌과 교류는 중세 유럽 문명의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비잔틴이 남긴 법률, 종교, 예술의 유산은 오늘날에도 동유럽과 지중해권 문화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