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세기 말 교황 우르바노 2세가 소집한 십자군은 이교도와의 투쟁을 선포하며, 그 과정에서 성지 정복을 위한 폭력 사용을 정당화했습니다.
십자군이란 무엇인가?
십자군은 11세기부터 13세기 사이에 가톨릭 교회가 조직한 일련의 군사 원정을 의미합니다. 이 원정의 목적은 기독교인들이 '성지'라고 부르는 팔레스타인 지역을 정복하고, 그곳에 기독교 왕국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제1차 십자군의 배경과 소집
예루살렘은 636년 칼리프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도시를 빼앗은 이후 무슬림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습니다. 11세기 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은 이베리아 반도(오늘날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위치한 지역)와 비잔틴 제국 영토에서 무슬림 왕국들의 확장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특히 비잔틴 제국에서는 튀르크족이 커다란 위협으로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교회는 '성지'를 되찾으려는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튀르크족의 팔레스타인 장악은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억압의 수단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순례는 죄를 용서받을 수 있는 길로 여겨질 만큼 매우 보편적인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성묘 교회가 가장 많이 찾던 곳)으로의 여정은 순례자들이 난파와 약탈 등 각종 위협에 노출되고, 지역에 따라 통행료를 강요당하는 등 비용이 매우 컸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십자군 소집을 설명해 주는 여러 요인들이 있습니다. 교회 입장에서는 교황 우르바노 2세가 기독교인들 내부의 갈등과 분쟁을 줄이기 위해 그들의 관심을 '이교도'와의 싸움으로 돌리고자 했다는 추측이 제기됩니다. 또한 튀르크족의 공격을 받고 있던 비잔틴 제국에 대한 지원은 1054년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로 분열된 서방과 동방 교회의 통합에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 구원과 죄의 사면이라는 약속, 그리고 약탈을 통해 토지와 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사람들을 참전으로 이끌었다는 점도 중요한 동기였습니다.
1095년 11월 25일,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을 호소했습니다. 그는 연설에서 "참회의 마음으로 이 대의에 헌신하는 자들은 과거의 죄를 용서받고, 교회가 부과한 현세의 모든 참회를 면제받을 것"이라고 약속했습니다. 즉, 교회는 '기독교 수호'라는 명분으로 싸우는 모든 이에게 구원을 약속했던 것입니다. 이 시기 교회는 '정당한 전쟁' 개념을 논의했으며, 무슬림, 곧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의 방어는 모두 정당하다고 간주했습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신도들이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싸우고 죽이는 것을 공식적으로 승인한 셈입니다.
십자군의 결과와 평가
1095년 십자군이 소집된 후, 주로 프랑스 병사들로 구성된 기독교 군대가 1099년에야 비로소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함락입니다. 1099년 6월 7일 시작된 예루살렘 공성전은 극심한 폭력으로 끝났으며, 기독교 군대는 도시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이후 예루살렘은 거의 한 세기가 지난 1187년, 이슬람의 영웅 살라딘이 이끄는 군대에 의해 재탈환됩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기독교인들은 원정에서 정복했던 영토를 하나씩 잃어갔고, 십자군의 최종 결산은 패배였습니다. 기독교 세력의 마지막 거점인 아크레가 1291년 이집트 맘루크 왕조에게 함락되면서 십자군은 막을 내렸습니다. 십자군은 기독교인과 무슬림 간의 갈등을 더욱 깊게 만들었지만, 한편으로는 큰 상업적 활력을 불러일으켜 중세 유럽에 도시의 재흥과 화폐 경제의 확산 같은 변화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