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0년 4월 22일은 포르투갈인들이 브라질에 도착한 날로 브라질 역사에 기록된 날짜입니다. 이 사건은 일부에서 '브라질의 발견'이라고도 불리며, 처음 13척의 선박으로 구성된 포르투갈 원정대는 선장장 페드루 아우바리스 카브랄(Pedro Álvares Cabral)이 이끌었습니다.
포르투갈 원정대와 브라질 발견의 소식은 원정대의 서기관 페루 바스 드 카미냐(Pero Vaz de Caminha)가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1500년 5월 2일까지 브라질 땅에 머물렀다가, 원정대의 최종 목표지였던 인도를 향해 항해를 계속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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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의 개척 정신

포르투갈인들의 브라질 도착은 15세기 내내 진행된 해양 탐사, 즉 대항해시대가 낳은 결실 중 하나입니다. 스페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먼저 도착했음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이 탐사 과정의 개척자로 평가받으며 이 시기 수많은 '발견'을 이루어냈습니다.
포르투갈의 개척자 역할은 역사학자들에 의해 연구되어 왔으며, 정치적·경제적·지리적 요인을 근거로 설명됩니다. 첫 번째 요인은 정치적 안정성과 포르투갈이 수세기 동안 통일된 영토를 유지해 왔다는 점입니다. 영토 측면에서 포르투갈은 이미 1249년 무어인을 축출했습니다. 반면 스페인은 1492년까지 무어인과 싸워야 했고,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1453년까지 백년전쟁으로 서로 대립했습니다.
통합된 영토를 기반으로 삼은 것 외에도, 포르투갈은 14세기 말 아비스 왕조가 시작되면서 안정적인 정치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당시 아비스 기사단장이던 주앙(João)이 포르투갈 국왕으로 즉위하면서 왕조가 개창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안정과 통일된 영토는 국가의 상업적·기술적 발전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이러한 기술 발전은 해상 항해술의 비약적인 개선으로 이어졌고, 이는 포르투갈이 대양을 탐사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이러한 탐사에는 포르투갈의 상업적·군사적·종교적 확장이라는 이해관계가 담겨 있었습니다. 무역 측면에서 포르투갈은 리스본이라는 매우 중요한 상업 중심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향신료(검은 후추, 계피 등)와 같은 이국적인 상품에 대한 관심이야말로 포르투갈의 해외 진출을 가장 강력하게 이끈 동력이었습니다. 인도는 향신료의 광대한 시장이었기에, 포르투갈은 인도와의 교역 관계 유지를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을 경유하던 전통적인 육상 무역로가 차단되면서, 포르투갈은 새로운 항로를 찾기 위해 바다를 탐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를 위해 포르투갈은 인도로 이어지는 항로를 찾고자 아프리카 대륙 연안을 탐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원정을 통해 마데이라, 아조레스, 카보베르데와 같은 곳에 도달했으며, 아프리카 연안을 따라 무역 거점인 상관(商館)을 설치했습니다. 또한 포르투갈인들은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전파를 명분으로 자신들의 세력권을 확장하고자 하는 열망도 지니고 있었습니다.
유럽인의 아메리카 대륙 도착
대서양 탐사가 활발해지던 이러한 시기에, 스페인은 서쪽으로 항해하여 인도에 도달하겠다고 결심한 한 탐험가에게 투자를 결정합니다. 바로 포르투갈에게 거절당했던 제노바 출신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였습니다. 스페인의 재정 지원을 받은 그는 세 척의 배를 이끌고 항해했고, 우연히도 1492년 10월 12일 아메리카 대륙에 도착하게 됩니다.
서쪽에 새로운 땅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포르투갈과 스페인은 앞으로 발견될지 모르는 새로운 땅에 대한 지배권을 놓고 외교적 분쟁을 벌이게 됩니다. 이 분쟁은 1493년 두 나라 간의 신대륙 분할을 정한 교황 칙서, 이른바 <인테르 카테라(Inter Caetera)>의 반포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 교서의 결과에 만족하지 못한 포르투갈은 스페인과 새로운 협상에 나섰고, 그 결과 1494년 토르데시야스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이 조약은 카보베르데 제도에서 서쪽으로 370리그 떨어진 지점에 가상의 경계선을 긋는 내용을 담고 있었습니다. 그 선의 서쪽(왼쪽) 땅은 스페인령으로, 동쪽(오른쪽) 땅은 포르투갈령으로 규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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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 도착

따라서 토르데시야스 조약의 체결은 포르투갈이 서쪽에 미지의 땅이 존재할 가능성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으며, 단지 아직 도달하지 못했을 뿐이라는 추측을 뒷받침하는 이정표가 됩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돌아 항로를 개척한 이후, 포르투갈은 인도와의 상업적 접촉을 성공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러한 맥락 속에서 페드루 아우바리스 카브랄의 원정이 조직된 것입니다. 포르투갈은 서쪽 바다의 가능성을 탐색한 뒤, 향신료를 구매하기 위해 인도로 향할 계획이었습니다.
원정대의 선장장은 카브랄이었으며, 그는 카라벨선 3척과 배 10척 등 총 13척의 선박을 이끌고 1500년 3월 9일 리스본을 출항했습니다. 원정대의 항로는 당시로서는 드문 경로를 따랐는데, 이는 인도로 가기 전에 먼저 서쪽을 탐사하기 위해 항로를 변경할 의도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원정대는 3월 29일과 30일 사이 대양의 무풍지대에 진입해 약 10일간 머물렀고, 4월 9일 적도를 통과했습니다. 4월 21일에는 육지의 첫 징후인 해조류가 목격되었습니다. 다음 날인 4월 22일, 아침에는 새들이 발견되었고 저녁에는 포르투갈인들이 파스코아 산(Monte Pascoal)을 육안으로 확인했습니다.
포르투갈인들은 그날 상륙하지 않았고, 4월 23일이 되어서야 카브랄은 니콜라우 코엘류(Nicolau Coelho)가 이끄는 배 한 척을 육지로 보내는 것을 허락했습니다. 그곳에서 원주민들과의 첫 접촉이 이루어졌으며, 이 사건은 페루 바스 드 카미냐가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일부 원주민들이 카브랄 앞에 데려왔고, 서기관이 남긴 기록은 양측의 문화적 차이를 생생하게 보여줍니다. 다음은 그 일부입니다.
선장이 가지고 있던 갈색 앵무새를 보여주자, 그들은 즉시 손으로 잡더니 육지 쪽을 향해 흔들며 마치 저곳에 있다고 말하는 듯한 몸짓을 했다. 숫양을 보여주자 그들은 무반응이었고, 닭을 보여주자 거의 겁을 먹었다 — 만지려 들지 않고, 눈에 커다란 경탄을 드러낸 채 그저 가져가려 할 뿐이었다.
그들에게 빵과 삶은 생선, 과자, 떡, 꿀, 무화과를 먹였으나, 그들은 거의 아무것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맛보기라도 하면 혐오스럽다는 듯 뱉어내곤 했다.|1|
4월 26일, 부활절이 지나면서 브라질 땅에서 열린 첫 미사가 거행되었으며, 이는 헨리크 드 코임브라(Henrique de Coimbra) 신부가 집전했습니다. 마침내 포르투갈 원정대는 1500년 5월 2일 인도를 향한 항해에 나섰습니다.

1500년 포르투갈인들의 브라질 도착이 곧바로 본격적인 식민지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포르투갈의 최우선 관심사는 여전히 향신료 무역이었고, 1530년대까지 포르투갈의 존재감은 해안가의 소규모 상관(商館)을 통해서만 유지되었습니다. 이 상관들은 브라질나무(파우 브라질)가 채벌되던 거점이기도 했습니다.
주석
|1| CASTRO, Silvio. <Pero Vaz de Caminha의 편지>. Porto Alegre: L&PM Pocket, 2013. p. 91
이미지 출처
[1] Wikimedia Common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