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술레이만 대제의 궁극적인 굴욕… 빈 공성전에서 폰 잘름이 거둔 승리

술레이만 대제의 궁극적인 굴욕… 빈 공성전에서 폰 잘름이 거둔 승리

모하치의 패배와 헝가리 왕위 분쟁

1526년, '위대한 자'라 불리던 오스만 제국의 술레이만 술탄이 헝가리를 침공하여 모하치 전투에서 라슬로 2세 국왕의 군대를 대파했다. 라슬로 2세가 죽자 합스부르크 대공 페르디난트가 그 뒤를 이어 헝가리 국왕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귀족 얀 자포여 역시 헝가리 왕위를 주장하며 튀르크와 손을 잡았다.

빈 정복이라는 야망

이러한 정세 속에서 술레이만은 초승달과 이슬람을 서유럽까지 퍼뜨리기 위해 빈마저 정복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막대한 병력을 소집했는데, 사료에 따라 병력 추계는 12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른다.

이들 가운데는 건장한 기병들, 정예 예니체리 군단, 그리고 수만 명의 아자프 병사와 규율 없는 잡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술탄은 1529년 5월 10일 콘스탄티노플에서 출정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징조는 좋지 않았다. 뜻밖의 봄비로 튀르크군은 불가리아에서 중포문 여러 문과 수송용 짐승들을 잃었고, 병사들 상당수가 병에 걸렸다.

8월 6일 튀르크군은 현재의 크로아티아에 해당하는 오시예크에 도착했고, 18일에는 헝가리의 옛 전장 모하치에 당도했다. 이곳에서 자포여의 군대가 합류했다. 튀르크군은 이 일대에 머무르며 여러 요새와 부다를 점령했으나, 프레스부르크(현 브라티슬라바)만은 버텨냈다.

오스트리아의 방어 준비

한편 오스트리아 측은 술레이만의 목표가 빈임을 간파하고 도시 방어를 조직하려 했다. 그러나 수만에 달하는 튀르크군에 맞설 수 있는 병력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초기에 도시 내 정규군은 적었고, 일부 시민들도 징집되었다.

오스트리아 총독 빌헬름 폰 로겐도르프가 명목상 최고 지휘권을 갖았지만, 실제 방어 지휘는 70세의 베테랑 노장 니콜라스(닉라스) 폰 잘름에게 맡겨졌다. 그는 정예 병사들을 이끌고 도시에 도착하자마자 방어 시설 강화에 박차를 가했다. 최종적으로 방어군은 병사 1만 7,000명과 민간인 약 3,000~4,000명을 확보했다.

모든 성문이 봉쇄되었고 성벽이 보강되었다. 도시 성벽은 낡은 중세식이라 튀르크 포격을 견딜 가망이 없었다. 이에 폰 잘름은 성벽 두께를 늘리고, 성벽 안쪽과 그 뒤편에 바스티온(돌출 요새)을 구축해 2차 방어선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그는 성 슈테판 대성당에 사령부를 설치하고 적을 기다렸는데, 적은 오래 기다리지 않게 했다. 성당의 종탑은 훌륭한 관측소 역할을 했다.

튀르크군의 도착과 항복 요구

술레이만과 그리스 출신 대재상 파르갈리 이브라힘 파샤가 이끄는 오스만 군대는 9월 24일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도시 앞에 도달했다. 공성전은 9월 27일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술레이만은 오스트리아 귀족 포로 셋을 보내 도시의 항복을 요구했다.

술탄의 메시지는 이러했다. “빈의 지도자와 주민들이여. 이슬람으로 개종하면 너희에게 아무 해도 미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저항한다면, 알라를 걸고 맹세컨대 너희 도시는 재로 변하고 노약자를 가릴 것 없이 모두 학살될 것이다.”

이에 폰 잘름은 술레이만에게 튀르크 포로 셋을 돌려보냈지만, 그 어떤 답도 하지 않았다! 도시 안에서는 “귀족이든 평민이든 모든 시민이 살아 있는 한 도시에 남겠다며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해 죽겠다고 맹세했다.”

튀르크군은 행군 도중 이미 끔찍한 만행을 저질러 거대한 피의 자취를 남겼다. 도시에 당도한 뒤에도 주변 마을과 읍의 주민들을 학살했다. 증언에 따르면 “수천 명의 사람들이 학살되거나 노예로 끌려갔으며, 임산부의 배에서 태아가 적출되어 으스러졌고, 젊은 여인들은 비참한 죽음을 맞았다.”

공성전 개시

이윽고 공성전이 본격화되었다. 튀르크군은 포위 참호를 파기 시작했고, 터널 공병들은 성벽 아래를 무너뜨리기 위해 지하 갱도 굴착에 나섰다. 곧 튀르크 포병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불가리아에서 중포문을 잃은 탓에 튀르크군이 사용할 수 있는 것은 경포뿐이었다.

그런데 9월 28일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튀르크군의 참호는 물과 진흙으로 가득 찼고, 갱도에 놓인 화약 통 여러 개가 젖어 폭발할 수 없게 되었다. 9월 30일에 비는 그쳤지만, 술레이만은 사실상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했다. 하늘이 그의 편이 아니었던 것이다.

더구나 방어군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폰 잘름은 끊임없는 돌출 공격과 반격을 조직해 튀르크군의 공사를 파괴하며 시간을 벌었다. 한 차례의 출격에서는 오스트리아군이 재상 이브라힘을 거의 생포할 뻔하기도 했다. 방어군은 튀르크군의 지하 갱도 다수를 무력화하는 데도 성공했다.

10월 9일의 위기

그러나 10월 9일 튀르크군의 갱도 하나가 폭발하면서 성벽에 길이 30m에 달하는 구멍이 뚫렸다. 즉시 튀르크 병사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그러나 폰 잘름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틈 뒤에는 병사 8,000명이 배치되어 창과 미늘창, 화승총을 들고 튀르크군을 대기하고 있었다. 양측 모두 막대한 피해를 입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폰 잘름이 부상을 입었음에도 오스트리아군은 끝까지 버텨냈다.

피비린내 나는 실패에 직면한 튀르크군은 보급 부족에 시달렸고, 잦은 비마저 발목을 잡았다. 심지어 예니체리들조차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이에 술레이만은 도시를 함락하거나 아니면 철수하거나, 운명을 걸고 총공격을 시도하기로 결심했다.

최후의 총공격과 철수

술레이만은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포상과 부, 관직을 약속했다. 이맘들이 알라와 '예언자'를 부르짖고 북소리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술레이만은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그들의 사기는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두 시간 동안 이어진 무기력한 공격 끝에 튀르크군은 물러났다. 굴욕을 안은 술레이만은 철수를 결정했다.

이것이 그의 인생 첫 대패였다. 고개를 숙인 채 그는 귀로에 올랐다. ‘황금 사과’라 불린 빈은 함락되지 않았고, 유럽은 이슬람화되지 않았다. 적어도 그때는. 술레이만은 1532년 다시 빈 원정을 감행하며 운을 시험했지만, 도시에조차 도달하지 못했다. 승전 몇 달 뒤인 1530년 5월 4일, 용맹한 폰 잘름은 세상을 떠났다.

술레이만 대제의 궁극적인 굴욕… 빈 공성전에서 폰 잘름이 거둔 승리

창에 꽂힌 갓난아기를 끌고 부모를 노예로 데려가는 튀르크 기병의 모습. 튀르크군의 만행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술레이만 대제의 궁극적인 굴욕… 빈 공성전에서 폰 잘름이 거둔 승리

니콜라스 폰 잘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