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영국 혁명: 세계 최초의 부르주아 혁명과 입헌군주제의 탄생

영국 혁명이란 무엇인가?

17세기에 일어난 영국 혁명은 근대사를 대표하는 핵심 사건 중 하나로, 세계 최초의 대규모 부르주아 혁명으로 평가됩니다. 여기서 '부르주아 혁명'이란 16~17세기 동안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하면서도 정치적 지위는 미미했던 유럽 부르주아 계급이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주도한 혁명을 의미합니다.

영국 혁명을 통해 영국의 부르주아 계급은 내전과 의회의 힘을 바탕으로 절대왕정에 맞서 싸워 승리했으며, 그 결과 국가의 정치 구조가 재편되어 1688년 입헌군주제(의회군주제)라는 새로운 통치 모델이 확립되었습니다.

영국 혁명의 역사적 과정은 다음 네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1. 청교도 혁명과 내전
  2.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
  3. 스튜어트 왕조의 복고
  4. 명예혁명

영국 혁명의 역사적 배경

튜더 왕조와 부르주아의 성장

16세기 대부분의 기간 동안 영국 부르주아는 튜더 왕조(헨리 8세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 1세)의 왕족 및 귀족들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특히 헨리 8세가 추진한 성공회 개혁(잉글랜드 종교개혁)은 귀족과 부르주아 양측에 막대한 경제적 이익을 안겨주었습니다.

가톨릭 교회가 소유하던 봉건 영지가 사유재산으로 전환되면서, 석탄 광산 개발이나 농업 경영을 목표로 하는 부르주아들에게 토지가 임대·매각될 수 있는 인클로저(울타리 치기) 운동이 활성화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은 영국이 로마에 바치던 공납에서 벗어나게 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영국 해군을 가톨릭 국가, 특히 스페인 선박과 정면으로 경쟁하는 위치에 놓이게 했습니다. 당시 '바다의 늑대(sea wolves)'라고 불린 많은 영국 해적들이 스페인 선박을 공격해 귀금속 등 화물을 약탈하여 영국으로 가져왔고, 이는 국내 시장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청교도주의와 의회 내 부르주아 세력

이처럼 튜더 왕조의 정책들은 부르주아 계급의 급격한 성장을 낳았습니다. 1590년대에는 부르주아가 이미 서민원(House of Commons), 즉 하원에서 상당한 대표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서민원은 왕권을 지지하는 귀족들로 구성된 귀족원(House of Lords), 즉 상원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문제는 부르주아의 이러한 힘이 청교도주의(잉글랜드 칼뱅주의)와 결합되어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청교도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가장 큰 호소력을 지닌 종교였으며, 반절대왕정 정치 급진주의에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습니다.

여기에 더해, 귀족과 왕실은 부르주아의 부 축적 능력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부르주아의 소득이 노동과 금융 투자에서 나오는 반면, 귀족의 소득은 세습적 특권, 조세 징수, 상업적 방식의 국가 독점 사업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튜더 왕조를 이은 스튜어트 왕조의 군주들은 부르주아를 정치적으로 억누르지 않으면 군주제 전체가 몰락할 것이라 판단하게 됩니다.

스튜어트 왕조의 대응과 갈등 심화

스튜어트 왕조의 초대 군주인 제임스 1세(재위 1603~1625)는 왕실 재정을 새로운 경제 현실에 맞추고 부르주아의 성장을 통제하기 위해 두 가지 조치를 취했습니다. 첫째, 증세와 강제 차입, 둘째, 부르주아 사업의 소득에 참여하는 수단으로서의 국가 독점 사업 설립이었습니다. 아울러 제임스 1세는 청교도들을 종교적으로 박해했고, 서민원과 대립하자 1614년부터 1622년까지 의회를 해산하고 활동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1625년 제임스 1세의 아들 찰스 1세가 즉위하자, 왕실은 증세를 위해 의회와 다시 타협을 시도했습니다. 귀족원은 왕의 편에 섰지만, 서민원은 다시 왕과 대립했고, 찰스 1세는 의회를 다시 해산해 버렸습니다. 의회는 1640년까지 소집되지 않았습니다.

1640년, 찰스 1세는 스코틀랜드와의 새로운 전쟁에 돌입하면서 전비 마련을 위해 부르주아의 세금이 필요해졌고, 다시 한번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러나 서민원은 또다시 협조를 거부했습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과거와 달리, 청교도 부르주아들은 왕과 귀족 세력에 대한 전면적인 대결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청교도 급진 지도자 올리버 크롬웰은 귀족들의 가발 쓰기를 거부했다 하여 '원두파(Roundheads)'라고 불린 부르주아 군대를 조직했습니다. 이 군대는 귀족의 전통 군대인 '기사당(Cavaliers)'이 방어하는 왕실군과 전쟁을 벌였고, 이로써 청교도 혁명, 곧 영국 내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청교도 혁명과 내전 (1640~1649)

청교도 부르주아와 왕실 간의 내전은 1642년, 올리버 크롬웰이 소상공인과 농민 출신 병사들을 규합해 신형군(New Model Army)을 창설하면서 격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토지 개혁을 요구한 디거스(Diggers)와 모든 시민의 평등한 권리를 주장한 레벨러(Levellers) 같은 급진 세력도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크롬웰은 신형군을 바탕으로 왕실군을 격파했고, 1649년에는 부르주아 급진파의 요구에 따라 찰스 1세의 처형이 집행되었습니다(1월 31일).

올리버 크롬웰의 '공화정' (1649~1658)

1649년 5월 19일 공화정이 선포되었고, 크롬웰은 의회로부터 호국경(Lord Protector)이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크롬웰이 추진한 여러 정치 개혁은 내전에서 자신을 따랐던 부르주아 계급의 이익에 부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1650년에 승인된 항해법(Navigation Acts)으로, 영국산 상품의 운송을 영국 선박에만 허용함으로써 해상 무역을 독점적으로 보호한 정책입니다.

그러나 크롬웰은 자신이 싸웠던 전제 군주들처럼 결국 의회와 적대하게 되었습니다. 1653년, 그는 부르주아 군대의 도움을 받아 의회를 해산하고 노골적인 독재 체제를 수립했습니다. 이 독재의 가장 큰 특징은 자신의 군대 창설을 도왔던 세력, 즉 디거스와 레벨러의 지도자들을 처형한 것이었습니다. 역사학자 크리스토퍼 힐은 저서 『1640년 영국 혁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1649년부터 1660년까지의 영국 혁명의 역사는 몇 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크롬웰이 버퍼드에서 레벨러들을 학살한 것은 군주제와 귀족제의 복고를 절대적으로 불가피하게 만들었다. 대부르주아와 젠트리 세력이 민중 세력과 결별한 이상, 그들의 지배는 군대(결국 지나치게 비용이 많이 들고 통제하기 어려움이 드러났다)에 의해서든, 아니면 구질서의 잔존 대표자들과의 타협에 의해서든 유지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1657년, 크롬웰은 의회파와 새로운 타협을 시도하며 영국 의회를 복원했습니다. 그러나 이 합의가 실효성을 갖기 전인 1658년, 크롬웰이 사망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은 아들 리처드 크롬웰은 아버지만큼의 위상을 갖지 못했는데, 특히 부르주아 급진파들 사이에서 그러했습니다. 민중 봉기와 새로운 내전을 우려한 의회는 위험한 수를 두었습니다. 바로 처형된 찰스 1세의 아들 찰스 2세를 불러 왕위에 앉히고 스튜어트 왕조를 복고시킨 것입니다.

스튜어트 왕조의 복고 (1660~1688)

1660년, 찰스 2세는 의회의 이익을 존중하겠다고 약속하며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바로 구 귀족 세력의 지도자들과 연합해 절대왕정을 복원하려 움직이기 시작했고, 루이 14세의 프랑스와 가까워졌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사회 현실은 아버지가 통치하던 시절과는 이미 크게 달라져 있었습니다. 새로운 전통적 타협을 이루는 데 실패한 찰스 2세는 칼뱅주의자(청교도)들에 대한 광범위한 종교 박해를 감행했습니다.

이 박해의 배경에는 찰스 2세의 가톨릭 교회 인사들과의 접근도 있었습니다. 스튜어트 왕가는 성공회 신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막대한 사회적 영향력과 토지 소유를 지니고 있던 성직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청교도 다수로 구성된 의회는 찰스 2세의 행보를 거부했지만, 다시 한번 전제주의의 희생양이 되었습니다. 찰스 2세는 1681년 의회를 해산하고 1685년 사망할 때까지 홀로 통치했습니다. 그의 뒤를 이어 동생 제임스 2세가 즉위하여 의회를 다시 열었지만, 절대왕정 복원이라는 찰스 2세의 노선을 그대로 계승하려 했습니다.

더 나아가 제임스 2세는 가톨릭으로 개종하고, 가톨릭 신자들에게 세금 면제 등 일련의 특혜를 주는 조치들을 시행했습니다. 의회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제임스 2세가 프랑스의 지원을 요청할 것을 우려한 의회 의원들은 무력 충돌 가능성을 피하기 위한 정치적 술수를 꾸몄습니다.

명예혁명과 입헌군주제의 확립

의회의 계획은 제임스 2세의 딸 메리 2세와 그녀의 남편, 즉 네덜란드 총독 오렌지 공 윌리엄을 불러 잉글랜드 왕위에 앉히는 것이었습니다. 윌리엄은 처음에 이 계획을 달가워하지 않았습니다. 적법한 상속인인 아내가 자신보다 더 큰 권한을 갖게 될 것을 걱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688년, 윌리엄은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에 상륙하여 제임스 2세를 폐위하고 의회를 지지했습니다.

왕에게 불만을 품고 있던 귀족들의 기병대는 왕을 방어하는 대신 윌리엄 편에 섰습니다. 아무런 방어막도 남지 않은 제임스 2세에게 윌리엄은 프랑스로의 망명을 허용했고, 그는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오렌지 공 윌리엄은 윌리엄 3세로서 잉글랜드 왕위에 올랐습니다. 이 군사 행동이 전쟁과 유혈 사태 없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라 불립니다.

그러나 의회는 윌리엄과 메리를 즉위시키기 전에 새로운 원칙을 제시했습니다. 두 군주는 이른바 1689년 권리선언(Bill of Rights)을 준수할 것을 서약해야 했습니다. 권리장전은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여 절대왕정의 어떠한 부활도 막았습니다. 이후 군주의 권력은 제한되었고, 정치적 의사결정 권한은 의회에 집중되면서 입헌군주제가 확립되었습니다. 아울러 개인의 자유, 특히 종교적 신념의 자유에 대한 약속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참고 문헌

HILL, Christopher. 『The English Revolution of 1640』. trans. Wanda Ramos. Lisbon: Editorial Presença; São Paulo: Livraria Marins Fontes, 1985. p. 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