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앙리 드 나바르(Henri de Navarre, 1553년 파우 출생 ~ 1610년 파리 사망)는 나바라 왕(1572~1610)이자 프랑스 국왕(1589~1610)으로 재위한 인물이다.
파우 성에서 태어난 '사자'
프랑스 역대 군주 중 가장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고 동시에 가장 호탕했던 이 인물은, 아버지 앙투안 드 부르봉(Antoine de Bourbon) 방돔 공작이 당시 거주하던 루아르 계곡에서 태어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외조부 앙리 달브레(Henri d'Albret)는 갓난아기가 “울음이 많고 까다로운 아이”가 되지 않도록, 딸 잔(Jeanne)에게 베아르 지방으로 돌아올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고 전해진다.
19세기 낭만적인 정서 속에서 화가 외젠 데브레리(Eugène Devéria)는 미래의 왕의 탄생을 그렸다. 파우 성에서 광대와 개까지 빠짐없이 모인, 이색적이면서 장난기 가득한 청중 앞에 승리자처럼 내보여진 갓난 왕자의 모습이다. 행복과 자부심에 격앙된 앙리 달브레는 아기를 청중 위로 높이 들어 올리며 “내 양이 사자를 낳았도다!”라고 외쳤다고 한다. 이어 그는 아기의 입술에 마늘을 문질러 바르고, 주랑송(Jurançon) 포도주로 얼굴을 적셔 주었다…
평민 아이들과 어울린 왕자
이토록 행운과 색다른 징표 속에 태어난 어린 앙리는, 이후 미래의 군주치고는 매우 특이한 교육을 받게 된다.
시골 저택을 소유한 미오상(Miossens) 부인에게 맡겨진 그는 마을 아이들과 함께 신나게 뛰어놀았다. 그는 그들과 함께 시골을 누비고, 놀이를 나누고, 검소한 음식을 먹으며 자랐다. 옷차림으로 자신을 드러내기는커녕 오히려 평범하게 지냈다.
그러나 1560년, 샤를 9세의 즉위로 프랑스 왕국 총사령관(lieutenant général)에 임명된 앙투안 드 부르봉은 가족을 파리로 데려왔다. 아들은 즉각적인 반응과 재치 넘치는 말솜씨로 루브르 궁정을 매료시켰다. 나바르 학원(Collège de Navarre)은 그를 받아들여 당시 귀족들이 받던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1562년 루앙 공성전에서 아버지가 전사하자, 종교개혁에 경도되어 같은 확신을 공유하던 잔 달브레는 자신의 영지로 돌아갈 명분을 얻었다. 이로써 앙리 드 나바르는 칼뱅주의자가 되었고, 이는 그를 험난한 모험으로 이끌며 한동안 왕좌로 가는 길을 막는 걸림돌이 되었다. 훗날 후사 없이 죽은 앙리 3세의 동생 앙주 공작의 자리를 계승하게 될, 바로 그 왕좌 말이다.
군사적 수련의 시작
잔 달브레는 아들의 장래를 위해 만전을 기하는 사람이기도 했다. 앙리가 겨우 열다섯 살이었을 때 어머니는 그를 라 로셸(La Rochelle)의 위그노 진영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서 그의 군사적 수련이 시작된다. 콩데 공작이 전사한 자르낙(Jarnac) 전투를 참관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젊은 베아르 출신은 곧바로, 실질적으로는 콜리니 제독의 지휘 아래 개신교 진영의 명목상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잔 달브레는 아들이 권력의 길로 나아가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앙리와 어린 콩데 공작을 대리고 생트(Saintes)의 개혁파 군대 진영에 도착하여 모인 지도자들과 병사들에게 선언했다. “친구들여,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보내신 두 분의 새 지도자이자, 내가 여러분께 맡기는 두 고아가 여기 있습니다.”
이토록 귀한 보물을 적의 공격에 즉시 노출시킬 수는 없었다. 앙리는 불행한 몽쿠투르(Moncontour) 전투(1569년 10월)를 멀리서 지켜보았는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콜리니의 잘못된 작전에 대해 현명한 논평을 남겼다.
베아르 언덕에서 보낸 소년 시절의 배회는, 훗날 남부 지역 전쟁을 특징짓는 '기습전(coups de main)'에 그를 알맞게 단련시켰다. 그는 소부대 운용법을 익혔고, 갑작스럽게 나타나 곧바로 사라지는 상황 속에서 전투 감각을 발달시켰다. 이윽고 콜리니가 거둔 아르네르뒤크(Arnay-le-Duc)의 승리에 그가 성공적으로 참여했음이 확인되었고, 이 사건은 카트린 드 메디시스로 하여금 생제르맹앙레 화약(1570)을 체결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궁정이라는 더 위험한 학교
화해의 보증은 이 젊은 베아르 출신과 샤를 9세의 누이동생, '마르고 왕후'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Marguerite de Valois)와의 결혼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서로 잘 맞지 못했다. 군사 교육에 이어 이번에는 궁정의 교육, 즉 더 미묘하고 더 '피렌체적'이며 똑같이 위험한 세계였다. 1572년 잔 달브레가 죽으면서 앙리는 스무 살이 채 안 된 나이에 나바라 왕이 되었다.
성 바르톨로메 축일의 대학살이 다가오고 있었고, 음모자들은 젊은 군주를 처형 대상 명단에 남겨두는 것이 마땅한지를 고심했다. 샤를 9세는 처형 유예를 간신히 받아냈다. 단, 처남이 배교할 것을 조건으로. 기회주의자였던 앙리는 죽음보다 미사를 택했다. 어떤 연대기 작가는 그가 “마음을 괴롭히는 슬픔 앞에서도 늘 평온한 얼굴과 항상 명랑한 기분을 유지하며” 이 매우 위험한 환경을 능숙하게 헤쳐 나갔다고 적었다.
위험 앞에서의 이러한 유쾌함, 불행 속에서의 이러한 일관성은 어린 시절부터 시련으로 단련된 이 인물의 특징이다. 전사(戰士)의 지혜와 용기에 더해, 섬세한 기동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 그리고 늘 변함없는 웅변 뒤에 최고의 수를 숨기는 외교관의 교활함까지 갖추었다. 덕분에 그는 처음부터 사람들의 호감을 얻었고, 상대방의 거부감과 편견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