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1871년 파리 코뮌: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하늘에 대한 공격'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파리 코뮌(Paris Commune)은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프랑스와 여러 나라 출신 노동자 및 대중 계급이 주도하는 정부 형태가 실현된 사건입니다. 수많은 사회 조직 혁신을 통해 파리 코뮌은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경험이 되었습니다.

1871년 파리 코뮌: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하늘에 대한 공격

글: 탈레스 핀토(Tales Pinto)

노동 운동의 집단적 기억

짧은 존재 기간에도 불구하고 파리 코뮌은 노동 운동의 집단적 기억 속에 남았으며, 이후 여러 혁명 과정에서 그 경험이 회자되었습니다. 1917년 러시아 혁명, 1918~1919년 독일 혁명, 1936~1939년 스페인 내전, 1968년 프랑스 5월 혁명, 1974~1975년 포르투갈 혁명 등이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파리 코뮌이 이처럼 오래 기억된 이유는, 이것이 최초의 노동자 정부 경험이었고 그 조직 형태가 사전에 정교하게 설계된 이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현실과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에 맞춰 실천 속에서 발전시킨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코뮌의 배경: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패배

파리 코뮌은 1870~18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데 따른 혁명적 결과물이었습니다. 1870년 9월 스당 전투에서의 패배는 황제 나폴레옹 3세의 몰락으로 이어졌고, 1871년 1월에는 아돌프 티에르가 의장을 맡는 공화정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치러진 국민의회 선거에서 같은 해 2월에 선출된 의원 다수는 주로 농촌 지주와 연결된 보수 진영 소속이었습니다.

한편 프랑스 영토에 주둔한 프로이센군은 파리를 포위했습니다. 수도 주민들은 프로이센에 대한 군대의 패배에 반대하는 시위를 여러 차례 벌였고, 열악한 생활·노동 조건의 개선을 요구했습니다. 프랑스 국민방위대 내부에서도 불만이 고조되어, 분견대별 지역 위원회를 기반으로 연방 구조가 형성되었고 몇 차례의 총회 끝에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가 결성되기에 이르렀습니다.

티에르는 2월 26일 프로이센 수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와 휴전 협정을 체결한 뒤, 정부 소재지를 베르사유로 옮기고 통제에서 벗어난 수도를 되찾으려 했습니다.

3월 18일 봉기

수도 탈환을 위해 티에르는 국민방위대가 보유한 대포와 중무기를 빼앗으려 했습니다. 3월 18일 이 목적으로 육군 분견대가 파리로 진입했지만, 티에르에게 불만을 품고 파리 시민 편에 선 병사들의 지원을 받은 국민방위대 중앙위원회의 저항에 부딪혀 실패했습니다. 특히 노동자 지역에 사는 여성들의 참여가 두드러졌는데, 이들은 군대 접근을 알리는 주요 정보원 가운데 하나였으며 국민방위대 동원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1871년 파리 코뮌: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하늘에 대한 공격
코뮌에 참여한 여성들이 파리의 바리케이드를 방어하는 모습을 담은 판화

코뮌의 조직적 토대

국민방위대 외에도 파리 주민들은 '혁명 클럽'이라 불리는 정치 협회를 통해 이미 자체적으로 조직화되어 있었습니다. 이 클럽의 기원은 1789년 프랑스 혁명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이들 클럽에서 파리 20개 구 국방 공화중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이는 코뮌 결성의 경험이자 프로이센군에 맞선 도시 방어 동원의 기반이 되었습니다.

코뮌에 지원과 경험의 원천을 제공한 또 다른 기관은 국제노동자협회(AIT), 즉 제1인터내셔널이었습니다. 1864년 창립된 AIT는 여러 나라의 노동자 단체를 규합했으며, 프랑스와 파리는 그 주요 거점 중 하나였습니다. AIT 역시 연방제 방식으로 조직되어, 런던에 본부를 둔 총평의회에 대해 각국 지부에 자율성을 부여했습니다.

코뮌의 성립과 혁신

대포 탈취 시도에 맞선 국민방위대 봉기 이후 며칠간, 파리 코뮌은 중앙위원회의 주도 아래 결성되었습니다. 3월 28일에는 코뮌을 구성할 대표를 선출하기 위한 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선출된 80명의 대표 가운데 25명은 노동자, 12명은 장인이었고, 나머지는 수도 각 구를 대표하는 지식인, 전문가, 일부 상인이었습니다. 선출된 이들의 정치적 성향으로는 AIT 회원, 블랑키스트, 자코뱅파, 급진 언론인 등 다양한 흐름이 있었습니다.

파리 코뮌의 혁신이자 이후 혁명들의 귀중한 경험이 된 것은, 대표와 관리들이 숙련 노동자보다 많은 급여를 받을 수 없도록 하고, 임무 수행 능력이 없다고 판명될 경우 언제든 해임할 수 있도록 한 결정이었습니다. 또한 전쟁, 재정, 교육 등 각 분야별로 대표들로 구성된 여러 위원회가 설치되어 부과된 과제를 수행했으며, 이 위원회들은 도시 곳곳에서 조직된 각종 인민 위원회의 지원도 받았습니다.

코뮌의 성과

코뮌의 출현과 함께 파리에는 다음과 같은 조치들이 시행되었습니다.

  • 남녀 간 시민적 평등 채택 (다만 여성에게는 투표권이 인정되지 않음)
  • 야간 노동 폐지
  • 상비군 폐지 및 시민 민병대로의 전환
  • 국가와 교회의 분리
  • 세속적·무상·실용 중심의 교육
  • 외국인의 피선거권 인정
  • 여성·아동 노동에 대한 제한
  • 미망인과 아동을 위한 연금 창설
  • 임금 벌금제 폐지
  • 방치된 공장의 노동자 이양

몰락: '피의 주간'

이러한 성과와 새로운 정부 실험의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내전의 발발은 코뮌 지지자들(코뮌나르)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습니다. 수도 주민인 코뮌나르는 프로이센 분견대의 지원을 받는 티에르가 지휘하는 군대와 맞서야 했습니다. 4월 2일부터 파리에 대한 포격이 시작되었고, 코뮌나르는 심각한 패배를 겪었습니다.

주가 지날수록 정규군의 군사적 우위와 방어 조직의 미비로 패배는 더욱 심해졌습니다. 결정적 패배는 1871년 5월 22일부터 28일까지의 한 주간, 이른바 '피의 주간(La Semaine Sanglante)'에 닥쳤습니다. 파리 각 구에서 조직된 인민 저항은 프랑스군과 프로이센 병력의 공세를 막아내지 못했습니다. 2만 명이 넘는 코뮌나르가 전투나 처형으로 목숨을 잃었고, 수천 명이 추방되었으며 1만 5천 명이 투옥되었습니다.

1871년 파리 코뮌: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하늘에 대한 공격
파리 코뮌 종식 후 관에 담긴 코뮌나르들의 시신

'하늘에 대한 공격'이라 불린 이유

역사상 최초의 노동자 정부 경험은 이렇게 비극적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코뮌나르들이 추구한 목표, 즉 사회의 완전히 새로운 조직 형태를 만들려는 야심 때문에 이 사건은 '하늘에 대한 공격'으로도 불렸습니다. 짧게 끝났지만 파리 코뮌의 실험은 이후 전 세계 노동 운동과 혁명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