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9월 29일에 열린 뮌헨 협정(뮌헨 회담)은 주데텐란트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네 개국의 수뇌부가 한자리에 모인 역사적 회담이었습니다.
뮌헨 회담은 1938년 9월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4개국 정상이 참석해 열린 회의를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이 회담에서는 아돌프 히틀러가 통치하던 독일의 이해관계와 얽힌 위기, 즉 체코슬로바키아 영토 내 주데텐(Sudeten) 지역 문제가 주요 의제로 다뤄졌습니다.
회담 과정에서 영국과 프랑스 지도자들은 나중에 '유화정책(appeasement policy)'이라고 불리게 되는 노선을 실질적으로 실행했습니다. 이 정책은 영토 문제에서 히틀러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었으며, 유럽 대륙에서 새로운 전쟁이 발발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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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팽창주의
뮌헨 회담이 열리게 된 배경에는 1938년부터 나치 독일이 본격적으로 추진한 팽창주의 정책이 자초한 위기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팽창주의는 나치가 내세운 핵심 이념 중 하나인 '생존 공간(lebensraum)' 확보라는 명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생존 공간'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독일에서 등장했으며, 당시 독일 사회에 만연했던 '독일인(게르만족)은 우월한 민족이다'라는 인식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독일인들은 역사적으로 게르만 민족이 거주해 온 영토에 제국을 건설할 '권리'가 있다고 여겨졌고, 이 제국은 중부·동유럽에 원래 살던 슬라브 민족의 존재를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라는 논리였습니다.
히틀러 역시 잘 알고 있었듯이, 이러한 '생존 공간'의 건설은 위협과 무력 행사 없이는 달성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의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패전과 대공황으로 경제가 파탄 상태였고, 군사력도 부족했기 때문에 그 목표에서 상당히 멀리 있었습니다.
'생존 공간'을 구축하기 위해 히틀러는 제1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고 독일에게 가혹한 조건을 강요했던 베르사유 조약의 규정을 정면으로 무시하며 독일군의 재무장을 추진했습니다. 잘 갖춰진 군사력은 이웃 국가들에게 위협이 될 수밖에 없었고, 필요하다면 무력을 통해 정복을 실현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독일군 재무장은 1934~1935년부터 점진적으로 진행되었습니다.
독일이 '생존 공간' 건설을 위해 처음으로 행동에 나선 상대는 오스트리아였습니다. 오스트리아의 경우 독일이 큰 어려움 없이 병합할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오스트리아 인구의 대부분이 게르만계였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도 오스트리아 병합 시도가 있었지만 성공하지 못한 바 있었습니다.
1930년대 들어 나치 치하에서 독일 경제가 호황을 누리면서 병합 기도는 다시 힘을 얻었습니다. 오스트리아 정부는 히틀러와 오스트리아 나치당의 압박에 시달렸고, 결국 1938년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영토를 침공했습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에서는 병합을 승인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으며, 이 사건은 '안슐루스(Anschluss)'라고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38년 안슐루스(오스트리아의 독일 병합)를 축하하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나치 퍼레이드.
그때까지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이 베르사유 조약의 규정을 정면으로 위반하고 있음에도 모든 것을 소극적으로 지켜보았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독일에 대한 강경 조치가 오히려 유럽 대륙에서 새로운 전쟁을 촉발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반영한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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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데텐란트 위기
오스트리아를 병합한 뒤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로 눈을 돌렸고,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 독일의 영토적 야욕이 억제될 것이라 믿었던 이들의 기대는 배신당했습니다. 나치의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관심은 그 나라 내부에 존재하던 체코인과 독일인 사이의 갈등에 불을 붙였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 인구의 대다수는 체코인이었지만, 주데텐(Sudetes)이라 불리는 지역에 독일계 소수민족이 밀집해 있었습니다. 체코인과 독일인 사이의 관계는 1929년 세계 대공황이 주데텐 독일인들의 재정 상황에 큰 타격을 입혔고, 독일 본토에서 나치당이 급성장하면서 1930년대에 점차 험악해졌습니다.
1930년대 내내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 내 독일인 극단주의 단체에 자금을 지원하고, 체코인들이 독일인에게 저질렀다고 주장하는 만행을 고발하는 선전 활동을 벌였습니다. 이러한 독일의 움직임은 주데텐 지역에 거주하는 독일인들을 결집시켰고,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분리주의(분리독립 운동)에 대한 목소리가 힘을 얻게 만들었습니다.
외교 무대에서 독일의 이러한 행보는 주데텐 지역 독일인 보호를 위한 것으로 포장되었지만, 히틀러의 진짜 관심사는 경제에 있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특히 군수품 생산 분야에서 고도로 발달된 산업 기반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산업 시설의 상당 부분이 주데텐란트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여기에 숙련된 노동력과 풍부한 석탄·철광 매장량까지 갖춰져 있었습니다.
독일의 체코슬로바키아 공격 기도는 영국과 프랑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 발발 시 상호 협력하기로 하는 조약을 프랑스와 맺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상황 개입을 결정한 인물은 영국 총수상 네빌 체임벌린이었으며, 그 계기는 1938년 9월 12일 히틀러가 행한 연설이었습니다.
그 연설에서 히틀러는 주데텐란트가 체코슬로바키아로부터 분리되어 독일에 귀속되는 방식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위협했습니다. 이에 체임벌린은 히틀러와의 회담을 요청했습니다.
뮌헨 회담
뮌헨 회담에 앞서 히틀러와 체임벌린은 두 차례 회담을 가졌지만, 히틀러의 요구 수준이 지나치게 높았기 때문에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리처드 J. 에번스(Richard J. Evans)에 따르면, 협상이 결렬된 후 영국과 체코슬로바키아는 전쟁에 대비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1|
전쟁은 독일의 장교 헤르만 괴링이 히틀러의 동의 없이 회담을 주선한 덕분에 피할 수 있었습니다. 이 회담이 바로 뮌헨 회담으로 알려지게 된 것입니다. 괴링이 이런 조치를 취한 데에는 그와 다른 많은 독일군 장교들이 당시 독일이 감당할 능력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이 시점에 전쟁이 터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괴링은 영국 총리 네빌 체임벌린, 프랑스 총리 에두아르 달라디에, 이탈리아의 지도자 베니토 무솔리니, 그리고 독일의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에게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히틀러는 괴링의 설득 끝에 참석을 수락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문제의 당사국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대표는 회담에 초대조차 받지 못했습니다.
회담은 1938년 9월 29일 독일 뮌헨에서 열렸으며, 13시간 동안 진행되었습니다. 회담이 끝났을 때 히틀러는 이전에 했던 전쟁 위협을 철회하기로 합의했고, 주데텐란트는 독일의 소유로 넘어갔습니다. 또한 히틀러는 체임벌린이 작성한 문서에 서명하며 유럽 대륙의 평화를 보장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전쟁을 피하기 위해 독일을 만족시킬 조건을 내주는 영국식 노선은 '유화정책'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정책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주권을 희생시키는 대가로 추진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유화정책은 실패였습니다. 히틀러는 팽창주의를 멈추지 않았고, 결국 1939년 9월 폴란드 침공을 명령하여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1| EVANS, Richard J. 『권력의 제3제국』. 상파울루: 플라네타, 2014, p. 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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