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빵을 찾아 베르사유로 — 1789년 10월 5일, 왕을 파리로 끌어온 여성들의 행진

혁명의 배경

1789년 5월 루이 16세가 소집한 삼부회가 실패로 돌아간 뒤, 제헌의회 의원들은 헌법 초안이 완성될 때까지 해산하지 않겠다고 맹세했습니다(1789년 6월 20일, 테니스 코트의 맹세). 혁명에 대한 열광 속에서 그들은 봉건적 권리와 특권의 폐지를 선포했고(1789년 8월 4일),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 준비에 착수했습니다. 이로써 혁명은 본격적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그러나 연이은 흉작으로 굶주림에 시달린 백성들은 자신들을 먹여 살리지 못하는 권력에 맞서 봉기했고, 왕정은 점차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1789년 10월 1일, 플랑드르에서 돌아온 연대를 환영하는 연회가 베르사유 왕립 오페라에서 열리자 굶주려 피마른 백성들의 분노는 폭발 직전에 이르렀고, 10월 4일에는 대군중이 팔레 루아얄 정원에 모였습니다.

1789년 10월 5일

빵을 찾아 베르사유로 — 1789년 10월 5일, 왕을 파리로 끌어온 여성들의 행진

등장 인물

앙투안 바르나브 · 마리루이즈 샤브리 · 질베르 모티에 드 라파예트 · 루이 16세 · 스타니슬라스 마야르 ·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 오노레 가브리엘 리케티(미라보 백작) · 장조셉 무니에 · 자크 네케르

행진의 전개 과정

1789년 10월 5일, 수천 명의 여성들이 빵을 요구하며 왕을 찾아 베르사유로 행진했습니다. 첫 번째 행렬은 의회에 들어가 왕 앞으로 안내해 달라고 요청했고, 왕실근위대 사령관 라파예트와 1만 5천 명의 근위대가 호위했습니다. 대표자 마리루이즈 샤브리와 국왕의 면담이 평화롭게 진행되던 중, 더욱 격앙된 두 번째 여성 무리가 도착했습니다. 라파예트는 질서를 회복한 뒤 곧바로 침대로 돌아갔고, 이 일로 '몰피우스 장군'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을 얻게 됩니다.

프랑스 국민과 장조셉 무니에의 압박 속에 루이 16세는 같은 날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비준했습니다. 재무장관 자크 네케르는 폭도들을 무력으로 해산하지 말라고 국왕에게 조언했습니다. 왕정이 잠든 사이 백성들은 지켜보며 분노를 키웠고, 다음 날 성문을 넘어서면서 근위병 두 명이 살해당했습니다. 이제 진짜 폭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군중이 성 안으로 들이닥쳤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뒷문으로 간신히 몸을 피했습니다. 라파예트가 급히 달려와 상황을 진정시키고, 군중을 달래기 위해 왕이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내도록 조언했습니다. 군중은 왕에게 파리로 와줄 것을 요구했고, 왕은 정중히 거절할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이어 소집된 의회에서는 바르나브와 미라보 대표의 강한 주장에 힘입어 무니에가 국왕을 따라 파리로 이동하기로 합니다. 의회는 권력과 불가분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빵과 밀을 실은 3만 명이 넘는 군중은 개선가처럼 파리로 돌아왔고, 왕실 일가는 '빵장이와 그 아내, 어린 빵장'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과 함께 튈르리 궁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결과와 영향

파리에 머물게 된 국왕은 이제 백성들의 손바닥 위에 놓였습니다. 그가 방금 비준한 선언문은 출생에 기반한 구체제(Ancien Régime)의 원칙에 종지부를 찍었습니다. 동시에 모든 인간의 권리와 평등에 기초한 새로운 사회의 초석을 놓았으며, 이는 가장 유명한 제1조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사람은 자유와 권리에 있어 평등하게 태어나고 산다."

군주를 베르사유에서 끌어낸 이 10월의 날들은 왕정의 느린 쇠퇴가 시작된 순간이었습니다. 왕정은 결국 1792년 8월 10일, 상쿨로트들이 루이 16세와 왕족을 튈르리 궁에서 끌어내 감옥에 가둔 날 공식적으로 폐지되고 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