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번주국들의 귀순, 그리고 남은 변수
1947년 7월 16일, V.P. 메논은 영국에 있는 인도부 차관보 패트릭 경에게 전보를 보냈다. 내용은 총독이 마이소르, 바로다, 그왈리오르, 비카네르, 자이푸르, 조드푸르 등의 대표단과 인도 편입 문제를 논의했으며, 모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는 것이었다. 이어 8월 2일에는 인도 내 거의 모든 왕(군주)들이 자신들의 영토를 인도 연방에 병합하기로 동의했다고 통보했다.
당시 망설이고 있던 곳은 하이데라바드, 보팔, 인도르 세 곳뿐이었다. 총독은 여러 토번 왕들과 직접 면담했고, 그 결과 그왈리오르, 파티알라, 코타, 조드푸르, 자이푸르, 램푸르, 나바나가르, 잘라와르, 파나, 테리 가르왈, 파리드코트, 상글리, 시타마우, 팔리타나, 케이라가르, 산두르 등 수많은 번주국의 왕들이 인도 연방 가입에 동의한 상태였다.
조드푸르, 파키스탄으로 기우는 젊은 마하라자
그런데 문제는 조드푸르였다. 조드푸르 주는 이미 1947년 4월 28일부터 인도 제헌의회에 참여하고 있었고, 젊은 마하라자 한완트 싱 역시 두 차례에 걸쳐 인도 합류 의사를 공식 발표한 바 있었다. 그러나 독립을 불과 열흘 앞두고 그는 파키스탄 건국의 주역 무함마드 알리 지나와 얽히게 되는데, 이 과정에 보팔과 돌푸르의 나와브가 중개자로 나섰다.
라지푸타나 지역이 독립적인 번주국 연합을 결성하려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자, 정치국(政治部) 내 친파키스탄 성향의 인사들은 라지푸타나의 번주국들에게 파키스탄과의 합병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당시 법적으로 인도는 파키스탄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번주국의 합병을 허용할 수 있었다. 조드푸르는 바로 그런 위치에 있던 국가 중 하나였다. 마하라자 한완트 싱은 인도 국민회의를 깊이 증오했고, 결국 조드푸르를 파키스탄에 붙이겠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지나의 백지 조약이라는 카드
지나와 무슬림 연맹 지도부는 조드푸르의 왕을 여러 차례 만났고, 마지막 회담에서는 자이살메르의 마하라쿠마르(황태자)까지 동석시켰다. 비카네르의 왕은 동행을 거부했고, 한완트 싱 역시 혼자 지나를 찾는 일을 주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눈앞에 나타나자 지나의 눈은 반짝 빛났다. 그는 이 두 번주국이 파키스탄에 합류하면 다른 라지푸트 번주국들도 연달아 따라올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것은 펀자브와 벵골 분할 과정에서 생길 지리적 공백을 메워주는 효과도 있었다. 인도 국회가 주요 번주국을 모두 손에 넣으려던 계획 역시 무산될 것이다. 지나는 백지에 서명한 뒤 자신의 펜과 함께 조드푸르 왕에게 건네며, 원하는 어떠한 조건이든 직접 적어 넣으라고 말했다. 몇 차례의 논의 끝에 한완트 싱은 파키스탄 합류에 동의하는 분위기로 흘러갔다.
자이살메르의 조건부 서명, 그리고 충격
지나는 이어 자이살메르의 마하라쿠마르에게도 서명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다. 마하라쿠마르는 하나의 조건을 달았다. 힌두교도와 무슬림 사이에 분쟁이 일어날 경우, 지나가 무슬림의 편을 들어 힌두교도에게 대항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는 폭탄이 터진 듯한 순간이었고, 옆에 있던 마하라자 한완트 싱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지나는 한완트 싱에게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한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이살메르의 마하라쿠마르가 파키스탄 합병을 거부하면서 상황은 뒤엉켰고, 마하라자는 심한 동요에 빠졌다. 이 틈을 놓치지 않은 것이 마하라자의 비서관인 케사리 싱 대령이었다. 그는 최종 결정에 앞서 어머니께 여쭙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마하라자는 이를 좋은 명분으로 삼아, 며칠 안에 신중히 생각한 뒤 답을 주겠다며 지나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케사리 싱 대령의 위기 감지와 경고
케사리 싱 대령은 조드푸르로 돌아오자마자 주 총리 C.S. 벤카타차르에게 사건의 전말을 보고했다. 음모의 심각성을 직감한 벤카타차르는 1947년 8월 6일, 비카네르 주 총리 사르다르 K.M. 판니카르에게 서신을 보냈다. 편지에는 보팔의 나와브가 조드푸르 마하라자를 데리고 지나를 알현했다는 사실, 그리고 지나가 조드푸르를 독립 국가로 인정하는 조약 체결에 즉각 응하겠다고 제안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지나는 추가로, 조드푸르 주에 필요한 무기를 파키스탄 항구를 통해 '한계세(邊際稅)' 없이 자유롭게 반입할 수 있게 해주겠다는 조건도 내걸었다. 더 나아가 조드푸르 마하라자를 라자스탄 전체의 군주로 세워주겠다고까지 제안했다. 이에 마하라자는 크게 동요했고, 스스로 라자스탄의 황제가 되겠다는 야심이 마음속에 자라나기 시작했다. 한편 케사리 싱 대령은 마하라자와 함께 지나의 관저까지 갔지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지 못해, 회담의 전체 조건을 알지 못한 상태였다.
"서명하면 라자스탄의 왕이 됩니다"
다음 날 마하라자가 보팔 나와브와 함께 지나를 다시 찾았을 때, 조약 초안은 이미 서명을 기다리는 상태로 준비되어 있었다. 그 자리에서 마하라자는 케사리 싱에게 이렇게 속삭였다. "이 조약에 서명하면 내가 라자스탄의 왕이 된다." 케사리 싱은 절대 그래서는 안 되며, 그 전에 반드시 어머니와 친족들과 상의해야 한다고 진심을 담아 만류했다.
결국 마하라자는 가족 구성원들과 상의한 뒤 8월 8일에 조약에 서명하겠다고 약속하며 지나에게 작별했고, 케사리 싱 역시 이 약속을 재확인했다. 조드푸르로 돌아온 한완트 싱은 사르다르 사만드 궁전에서 번주국의 봉신(재상·귀족)들을 소집해 의견을 물었다. 그러나 담리 탁루를 제외한 어떤 자크기르다르(영지 영주)도 인도 정부와 무력으로 맞서 싸울 뜻이 없었다.
분노하는 조드푸르, 움직이기 시작한 메논
마하라자는 조드푸르에 사흘간 머물렀다. 그러나 파키스탄 합류 문제를 둘러싸고 조드푸르의 여론은 극도로 험악했다. 사흘 뒤 한완트 싱이 델리로 돌아왔을 때, 메논에게는 긴급한 경고가 전해졌다. 지금 즉시 마하라자를 인도 쪽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그는 파키스탄에 합류해 버릴 수 있다는 것이었다. 메논은 즉시 총독 마운트배튼을 찾아가 조드푸르 마하라자의 인도 귀순을 위해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