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스니아 전쟁은 유고슬라비아의 영토 분열과 보스니아를 구성하던 여러 민족 간의 대립이 빚어낸 비극적인 결과였습니다.

보스니아 전쟁 개요
보스니아 전쟁은 1992년부터 1995년까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독립을 선언한 직후 벌어진 전쟁입니다. 이 분쟁은 유고슬라비아 내부에 오래 누적되어 온 민족 갈등에서 비롯되었으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되는 과정에서 폭발했습니다. 전쟁으로 10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고, 특히 보스니아 무슬림(보스니아크)을 향한 전쟁 범죄로 얼룩졌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형성
구유고슬라비아 지역에 대한 외세의 지배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젊은 보스니아(Mlada Bosna)' 운동으로, 이 단체는 1914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 사건을 일으켰고, 이 사건은 곧 제1차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18년,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라는 유고슬라비아의 원형이 등장했고, 1929년에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개칭되었습니다. 이 왕국은 제2차 세계대전 중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공으로 분열되었다가 종전과 함께 다시 통합되었습니다. 전후 유고슬라비아를 이끈 지도자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장군이었습니다.
티토는 1945년 유고슬라비아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을 수립했습니다. 이 나라는 여섯 개 공화국, 즉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로 구성되었습니다. 지역의 민족적·종교적 갈등은 티토의 강권 통치 아래 억눌려 있었지만, 1980년 티토가 사망하면서 민족주의 운동이 다시 힘을 얻기 시작했습니다.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은 각 민족마다 지도자를 배출하는 결과로 이어졌습니다. 대표적으로 크로아티아의 프란요 투지만,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가 있습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까지 유고슬라비아의 정치 논쟁은 온전히 민족 문제에 집중되었고, 1991년 소련의 붕괴로 외부 견제 세력이 사라진 것이 독립운동을 밀어붙인 마지막 계기가 되었습니다.
유고슬라비아의 분열
유고슬라비아의 분열은 1991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 선언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두 나라의 독립 선언에 유고슬라비아군은 무력으로 대응했습니다. 슬로베니아에서의 충돌은 10일 만에 종결되었지만, 크로아티아에서의 전쟁은 1995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같은 해 세 번째 독립 국가로 마케도니아가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보스니아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독립 의지를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러나 보스니아의 독립은 국내의 복잡한 민족 구성 때문에 훨씬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당시 기준으로 440만 인구 중 44%가 보스니아 무슬림, 31%가 세르비아인, 17%가 크로아티아인이었습니다.
보스니아의 세 주요 민족 집단은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보스니아크는 보스니아의 완전한 독립과 보스니아크 주도 정부 수립을 추구했고, 세르비아인은 세르비아인이 다수 거주하는 보스니아 영토를 유고슬라비아에 편입할 것을 주장했으며, 크로아티아인은 보스니아 전역을 크로아티아에 편입하는 것을 원했습니다.
보스니아 세르비아인의 대표는 라도반 카라지치였습니다. 그는 보스니아크 인구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으며, 보스니아가 독립을 선언하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공공연히 위협했습니다. 1991년 말부터 1992년 초에 걸쳐 세르비아군은 사라예보 교외에 배치되어 수도를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전쟁은 1992년 4월, 사라예보의 세르비아인들이 보스니아크 주민에 대한 공격을 시작하면서 본격화되었습니다.
전쟁의 경과

라도반 카라지치는 전쟁 중 자신의 부대가 자행한 집단학살로 징역 4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보스니아 세르비아군은 전쟁 준비가 부족했던 보스니아크군을 상대로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습니다. 보스니아의 수도 사라예보는 보스니아 세르비아군에게 완전히 포위되었고, 세르비아군은 보스니아 영토의 다른 지역으로도 진격을 거듭했습니다.
이 전쟁은 보스니아크 인구를 절멸시키려는 세르비아 측의 '민족 청소' 시도로 얼룩졌습니다. 스레브레니차 근교 마을에서 자행된 학살에 대한 구스타부 실바의 증언이 그 참상을 생생하게 전합니다.
수백 명의 남성들이 뉴 카사바 마을 근처에서 붙잡혀 도시의 축구 경기장으로 끌려갔다. 미군 정찰기가 그곳의 항공 사진을 촬영했을 때, 잔디밭 위에 600명의 남성들이 모여 있었다. 며칠 후 같은 비행기가 상공을 다시 지나갔을 때, 남성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경기장 주변은 완전히 변모해 있었다. 식생이 사라지고 최근 파낸 흔적이 뚜렷했다. 결론은 하나였다. 그곳은 집단 매장지였다.
전쟁에서 보스니아 세르비아 측의 우세는 1994년 중반까지 이어졌습니다. 서방 열강의 압박으로 세르비아가 라도반 카라지치와 라트코 믈라디치(보스니아 세르비아군 총사령관)의 부대에 대한 지원을 철회하면서 전세가 반전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 이란군을 비롯한 외국 병력의 참전과 무슬림 국가들의 재정 지원도 보스니아가 초기의 열세를 만회하는 데 큰 힘이 되었습니다.
사라예보 포위전에 투입된 세르비아군은 수개월 동안 중포병으로 도시를 포격했으며, 정예 포병들에게는 거리를 걷는 민간인을 발견하는 대로 무차별적으로 사격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또한 보스니아 농촌 지역의 마을들에서도 수많은 학살이 자행되었는데, 그중 가장 악명 높은 것이 스레브레니차 안전지대에서 일어난 학살입니다.
전쟁 막바지에 보스니아 세르비아 무장 세력이 안전지대를 침공해 학살을 자행했고, 이로 인해 8,000명이 넘는 보스니아크가 살해당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일부 주민들은 숲속으로 필사적인 도주를 감행해야 했으며, 생존자들은 30km가 넘는 거리를 숲을 헤치며 걸어야 했습니다.
데이턴 협정과 전후 처리
보스니아 세르비아군의 고립이 심화되자 카라지치는 1995년 데이턴 협정 체결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협정에는 독립 보스니아의 유지와 국내 평화 공존을 위한 조항들이 담겼습니다. 또한 서로 다른 민족 집단을 묶기 위해 두 개의 내부 연방체가 만들어졌습니다. 보스니아크와 크로아티아인의 통제 아래 있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 그리고 보스니아 세르비아인의 통제 아래 있는 스프스카 공화국이 그것입니다.
보스니아에서 저질러진 전쟁 범죄의 많은 책임자들은 국제 재판소에 회부되었고, 다수가 집단살해 및 기타 전쟁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카라지치 역시 징역 40년을 선고받았습니다.
|1| SILVA, Gustav. From rose to dust: Stories from post-genocide Bosnia. Rio de Janeiro: Tinta Negra Bazar Editorial, 2011, p.17.
|2| 상동, p.81
* 이미지 출처: Northfoto,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