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브라질 노예제 폐지의 숨은 동력, 노예들의 자발적 투쟁

브라질 노예제 폐지의 숨은 동력, 노예들의 자발적 투쟁

노예들이 주인에 맞선 투쟁은 노예제 체제 내부의 균열을 일으킨 결정적 흐름으로, 1888년 브라질 노예제 종식을 이끈 핵심 동력이 되었다.

글: 타우스 핀투(Tales Pinto)

국가와 엘리트 중심 서술의 한계

오랫동안 브라질 노예제의 종식은 영국의 압박을 받은 브라질 국가의 조치, 즉 1888년 이자벨 공주가 서명한 황금법(Lei Áurea)으로 마무리된 일련의 입법 과정으로 제시되어 왔다. 동시에 임금노동이 노예노동보다 더 수익성이 높다고 판단한 커피 농장주 엘리트들의 이해관계가 반영된 결과로도 설명되었다.

그러나 노예제 폐지를 압박한 주요 동력으로서 노예 투쟁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조명되지 않는다. 노예제가 브라질 식민지 사회와 제정 사회의 근간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예 투쟁은 이 체제 내부에서 균열을 일으키는 흐름이었으며, 19세기 말에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식민지 시대부터 이어진 저항, 킬롬보

이러한 투쟁은 노예제가 시작된 때부터 존재했다. 식민지 시기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는 오늘날 알라고아스주에 해당하는 세라 다 바리가(Serra da Barriga) 지역에 세워진 팔마레스 킬롬보(Quilombo dos Palmares)이다. 이 외에도 여러 킬롬보가 형성되었는데, 규모는 상대적으로 작았지만 그 중요성은 컸다. 농장에서 탈출한 노예들은 자유를 추구하며 노예제와의 단절을 만들고자 했기 때문이다.

체제 안의 개선을 요구한 탈출

탈출이 항상 노예제와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지는 않았다. 상당수는 노예제 내부의 조건 개선을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탈출 협상'이 대표적인데, 현장에서 더 나은 노동 조건을 요구하기 위해 벌어진 것이었다. 그 예로 바이아주 일헤우스 지역 상타나 설탕농장(Engenho Santana) 노예들의 탈출을 들 수 있다. 1789년 한 무리의 노예들이 농장을 떠나 인근에 킬롬보를 세우고, 주인에게 조약을 제시했다. 그 안에는 더 나은 노동 조건, 새로운 감독관 선출, 그리고 "우리가 원하는 어떤 때든 방해받거나 허락을 구할 필요 없이 놀고, 즐기고, 노래할 권리"가 담겨 있었다[1]. 이 사건은 노예들의 투쟁이 일터 안 일상의 변화를 향한 것이었음을 잘 보여준다.

반란과 말레스 봉기

노예들이 선택한 또 다른 투쟁 형태는 반란이었다. 19세기 초 바이아에서는 약 30건의 노예 반란이 일어나거나 계획되었고, 상당수는 경찰의 개입으로 저지되었다.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835년의 말레스 반란(Malês Revolt)이다. 같은 세기 초 노예들이 주도한 격렬한 혁명으로 노예제가 종식된 아이티 독립을 의식할 때, 아프리카계 노예들의 봉기는 브라질에서도 유사한 사태가 재현될지 모른다는 공포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문자 그대로 농장주들의 목숨을 위협하는 문제였다.

도시와 연결된 킬롬보의 역할

도시 인근에 킬롬보를 건설한 것 역시 브라질 노예제 체제를 약화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킬롬보 주변에서 해방 노예, 친족, 심지어 백인 주민들과 연대망을 형성하면서, 자유 속에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는 소규모 상거래가 가능해졌다. 나아가 자유민들과의 교류는 반노예제 감정을 확산시키는 토양이 되었다.

입법과 갈등의 심화

폐지 관련 입법은 오히려 노예와 주인 간 사회 갈등을 더욱 격화시켰다. 1850년 에우세비우 드 케이로스법(Eusébio de Queirós Law)으로 아프리카로부터의 노예 수입이 금지된 뒤 국내 노예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규율 없는' 노예로 취급된 이들이 남중부 농장으로 이송되었다. 그 과정에서 노예들은 스스로 노동의 강도와 업무 범위를 정하는 이른바 '공정한 예속'의 조건을 요구하며 맞섰다.

1871년의 자궁자유법(Law of the Free Womb) 역시 노예들이 자신이 처한 노예 상태에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하도록 이끌었다. 1885년에는 상파울루 내륙 캄피나스에 위치한 칸타갈루 농장(Fazenda Cantagalo)의 노예 120명이 반란을 일으켜 도시를 향해 집단 탈출했고, 행진 내내 "자유 만세(Viva a Liberdade)!"를 외쳤다.

1888년으로 이어진 내부 균열

이 모든 행위는 더 큰 규모의 움직임으로 발전할 경우 브라질 지배 엘리트의 경제적·정치적 권력을 뒤흔들 수 있는 사회적 동요의 분위기를 조성했다. 다른 요인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노예들이 스스로의 주체성으로 수행한 노예제 반대 투쟁은 노예제 체제 내부에 결정적인 균열을 만들어 1888년 그 종식을 앞당긴 핵심 동력이었다.

[1] 참고 문헌: AMARAL, Sharyse Piroupo do. 『브라질 흑인의 역사(História do Negro no Brasil)』. 브라질리아: 교육부 평생교육·문해·다양성 사무국; 살바도르: 아프로-오리엔탈 연구센터,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