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브라질 검공화국(1889~1894): 군인 대통령 두 명이 이끈 제1공화국의 격변기

검공화국(República da Espada, '검의 공화국')은 브라질 제1공화국 시대(1889~1930)의 막을 연 초기 구간으로, 군인 출신 대통령 두 명이 연달아 집권했던 시기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브라질 검공화국(1889~1894): 군인 대통령 두 명이 이끈 제1공화국의 격변기

검공화국이란?

검공화국은 브라질 제1공화국(1889~1930)의 첫 번째 시기입니다. 이 시기 브라질을 이끈 것은 데오도루 다 폰세카 원수(Marshal Deodoro da Fonseca)와 플로리아누 페이소투 원수(Marshal Floriano Peixoto)였습니다. 데오도루는 임시 정부와 헌정 정부라는 두 단계에 걸쳐 1889년부터 1891년까지 집권했으며, 그의 사임 후 부통령이던 플로리아누 페이소투가 1891년부터 1894년까지 대통령직을 수행했습니다.

군주제 붕괴의 배경

검공화국은 1889년 11월 15일 브라질 공화국 선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날 브라질의 군주제 정부는 쿠데타로 무너졌고, 공화정 체제로 대체되었습니다. 공화국 선포는 여러 정치 세력의 불만이 누적된 결과였으며, 군주제 종말의 배경은 크게 세 가지 축으로 설명됩니다.

  1. 종교 문제: 베렝(Belém)과 올린다(Olinda)의 두 주교가 황제의 명령을 거부하고 시민 불복종을 감행했다가 체포된 사건을 계기로, 국가와 교회의 분리를 상징하게 된 갈등입니다.
  2. 군부 문제: 파라과이 전쟁 이후 군 내부의 불만이 커지면서 빚어진 문제입니다. 육군은 황제로부터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자 점차 군주제 질서에 대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습니다.
  3. 노예제 문제: 특히 파라이바 계곡(Vale do Paraíba) 지역 노예 소유주들과 국가 사이의 결별을 상징합니다. 노예 소유 계층의 이익을 침해한 황금법(Lei Áurea, 1888년 노예제 폐지법)이 이 결별의 직접적인 원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요인들이 겹치면서 1880년대 브라질은 만성적인 정치 위기에 빠졌습니다. 군주제는 더 이상 여러 정치 세력의 이해관계를 수용하지 못했고, 그 결과 대안 정부 형태로서 공화제에 대한 요구가 커져갔습니다.

공화주의 세력이 확장되면서 당대의 유력 인사들은 1889년 11월 데오도루 다 폰세카 원수를 찾아가 정부 전복 쿠데타의 주도를 요청했습니다. 데오도루는 본래 군주주의자였지만, 정부에 대한 불만이 쌓여 있던 터라 쿠데타 주도를 수락했습니다. 1889년 11월 15일 쿠데타로 각료 내각이 무너졌고, 몇 시간 후 언론인 조제 두 파트로시니우(José do Patrocínio)가 공화국 선포를 알렸습니다.

임시 정부와 1891년 헌법

공화국 선포 이후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고, 데오도루 다 폰세카가 브라질의 임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임시 집권 기간 동안 데오도루는 권위주의적 행보를 보였고, 이에 반발한 정치인들은 새 헌법 제정을 서둘러 추진했습니다.

입헌 의회는 신생 브라질 헌법을 작성할 다섯 명을 위촉했습니다. 초안은 루이 바르보자(Rui Barbosa)가 수정·보완했고, 입헌 의회의 심의를 거쳐 1891년 2월 24일 승인·공포되었습니다. 1891년 헌법은 브라질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연방제: 주(州)로 개편된 각 지역에 더 큰 자치권을 보장하는 체제였습니다.
  • 남성 보통선거권: 21세 이상 남성 중 문맹이 아니면서 거지나 하급 병사에 해당하지 않는 사람에게 선거권이 주어졌습니다. 여성은 투표권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 대통령제: 대통령은 브라질 행정부의 최고 수반으로 확립되었으며, 직접선거로 선출되는 4년 임기직이었습니다.

브라질 검공화국(1889~1894): 군인 대통령 두 명이 이끈 제1공화국의 격변기
데오도루 다 폰세카 원수는 1889년부터 1891년까지 브라질 대통령을 지냈습니다.

데오도루의 독주와 사임

새 헌법 공포 후 간접선거가 실시되어 데오도루 다 폰세카가 헌정 임기의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임기 중에도 그는 권위주의 노선을 고수하며 브라질 의회와의 정면 대립을 감행했습니다.

1891년 11월 3일, 데오도루는 의회 폐쇄를 포고하고 새 의회 구성을 위한 재선거를 실시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울러 입법부와 사법부를 약화시키는 대신 행정부를 강화하기 위해 헌법을 개정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조치는 특히 플로리아누 페이소투를 지지하는 정치인들과 해군으로부터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결국 대통령은 같은 해 11월 23일 사임할 수밖에 없었고, 그의 뒤를 부통령이던 플로리아누 페이소투 원수가 이었습니다.

플로리아누 페이소투 정부와 반란

플로리아누 페이소투 집권기의 가장 큰 특징은 브라질 곳곳에서 일어난 반란과 이에 대한 정부의 강경 진압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철마샬(iron marshal)'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대표적인 반란으로는 연방주의자 혁명과 해군 반란이 있습니다.

연방주의자 혁명(Revolução Federalista, 1893~1895)은 히우그란지두술(Rio Grande do Sul)의 정치 세력 간 갈등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원내각제를 옹호하던 세력이 현지 연방주의자들과 무력 충돌을 벌였고, 브라질 정부는 이 분쟁에서 연방주의자 편에 섰습니다. 약 1만 명의 사망자를 낸 이 전투는 이후 산타카타리나(Santa Catarina)와 파라나(Paraná)로 확산되었고, 정부가 지지하는 세력이 최종적으로 승리했습니다.

해군 반란(Revolta da Armada, 1893~1894)은 해군이 일으킨 반란으로, 함선들을 장악한 반란군이 리우데자네이루로 진격해 도시를 포격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반란을 군주주의자들의 플로리아누 페이소투 정부에 대한 반발로 봅니다. 당시 해군은 군주주의자가 많은 부대였기 때문입니다.

이후 해군 반란 관련자들은 산타카타리나 지역으로 이동해 연방주의자 혁명에서 연방주의자들과 싸우던 의회주의 자유파와 손잡았습니다. 그러나 이 운동은 실패로 끝났고, 브라질 군주주의는 결정적으로 약화되었습니다.

엔실랴멘투 경제 위기

검공화국은 정치 위기뿐 아니라 극심한 경제 위기로도 얼룩졌습니다. 이 경제 위기는 재무장관 루이 바르보자가 시행한 정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는 경제 활성화를 위해 민간 은행의 지폐 발행을 허용하고 신용 대출 접근을 용이하게 했습니다.

그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브라질 경제는 화폐 가치 하락, 금융 투기 확산, 인플레이션 상승이라는 삼중고에 시달렸습니다. 엔실랴멘투(Encilhamento)의 후유증은 1897년경 프루덴치 드 모라이스(Prudente de Morais) 정부 시기에야 수습되었습니다. 한편 이 경제 위기는 1873년부터 이어진 세계적 자본주의 위기의 흐름 속에서 발생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Sergey Kohl 및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