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울 카스트로(Raúl Castro)는 1959년 쿠바 혁명에 참여한 핵심 혁명가 중 한 명입니다. 이 혁명은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독재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의 형 피델 카스트로를 쿠바의 권력 자리에 올렸습니다. 라울은 쿠바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사람이었으며, 2008년부터 2018년까지 10년간 국가 주석직을 수행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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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과 가정 배경
라울 모데스토 카스트로 루스(Raúl Modesto Castro Ruz)는 1931년 6월 3일 쿠바 비란(Birán)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앙헬 마리아 바우티스타 카스트로 이 아르기스는 스페인계 농부로, 스페인-미국 전쟁 당시 쿠바로 이주해 사탕수수 농장을 운영하며 성공을 거둔 인물이었습니다.

라울 카스트로의 어머니는 리나 루스 곤살레스(Lina Ruz González)로, 스페인인 후손 출신 쿠바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처음에는 앙헬의 농장에서 하녀로 일했지만, 훗날 그의 아내가 되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일곱 명의 자녀가 있었고, 라울은 넷째였습니다. 이 부부의 또 다른 저명한 아들이 바로 피델 카스트로입니다.
라울 카스트로의 가정은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그는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쿠바 최고의 학교 중 하나인 벨렌 칼레지오(Colegio Belén)에서 공부했는데, 이곳은 예수회가 운영하는 학교로 쿠바 부유층 자녀들이 다니던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질 높은 교육 환경에도 불구하고 라울은 우수한 학생이 되지 못했습니다. 전기 작가들에 따르면 그의 학업 성적은 좋지 않았다고 전해집니다.
청년 시절 라울 카스트로는 마르크스주의 이념에 경도되었고 여러 혁명 단체에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내세우는 좌파 정당인 인민사회당(People's Socialist Party)과 연결되었습니다. 형 피델과 달리 라울은 젊은 시절부터 마르크스주의 신봉자였다는 점이 특징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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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 투쟁
라울 카스트로는 미국 정부의 지원을 받은 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풀헨시오 바티스타의 독재에 맞섰습니다. 바티스타 정권에 대한 반발이 커지면서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혁명 조직이 결성되었고, 라울도 이 조직에 합류했습니다. 이들의 첫 번째 행동은 1953년에 일어났습니다.
그해 이 혁명 조직은 산티아고데쿠바에 위치한 몽카다 병영(Moncada Barracks) 습격을 감행하기로 결정합니다. 목표는 병영에 저장된 무기를 탈취하는 것이었습니다. 라울 카스트로는 병영을 직접 공격하는 부대에는 속하지 않았고, 소수 인원으로 구성된 제2팀에 배속되어 시의 사법궁전(법원)을 점거하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라울 카스트로와 동료들은 법원 건물을 점령했지만, 병영 습격이 실패하자 건물을 버리고 철수했습니다. 라울은 도주하여 며칠간 몸을 숨겼으나 결국 체포되어 재판에 회부되었고, 13년형을 선고받아 수감되었습니다.
그러나 라울과 그의 형의 운명은 뜻밖에도 바뀌게 됩니다.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정치범에 대한 사면을 단행하면서 두 사람은 석방되었고, 안전을 위해 쿠바를 떠났습니다. 멕시코 망명 기간 동안 피델 카스트로는 7월 26일 운동(M-26-7)을 창설하고 쿠바 독재자와의 투쟁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멕시코 체류 중 라울 카스트로는 과테말라의 군사 쿠데타를 피해 망명 온 아르헨티나 출신 젊은 의사를 만났습니다. 그가 바로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였으며, 그는 피델 카스트로가 이끄는 운동에 합류하게 됩니다. 1956년 M-26-7의 멤버들은 쿠바로 돌아가 바티스타 정권과의 싸움을 시작하기로 결심했습니다.
쿠바 혁명
라울 카스트로는 요트 '그란마(Granma)'호에 탑승하여 멕시코만과 카리브해를 건넜습니다. 이 배에는 총 82명이 탑승해 있었지만, 항해는 순탄하지 않았고 일행은 예정보다 늦게 쿠바에 도착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쿠바 정부는 이미 혁명가들의 도착 소식을 파악하고 있었고, 군대를 동원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쿠바에 상륙하자마자 요트에 탔던 82명은 쿠바군의 공격을 받아 대다수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라울 카스트로는 생존한 12명 중 한 명으로, 시에라마에스트라(Sierra Maestra) 산맥으로 몸을 숨겼습니다. 혁명 세력은 그곳에서 처음부터 다시 힘을 키워 나갔습니다.
1957년부터 M-26-7은 농민들의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회복했고, 조금씩 바티스타 정권과 맞서며 승리를 거두기 시작했습니다. 1958년부터 쿠바 게릴라의 힘이 더욱 강해지면서 의미 있는 승리들이 이어졌습니다. 라울 카스트로는 코만단테(사령관) 계급을 보유했지만, 많은 역사학자들은 그가 이 역할에서 뚜렷한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며 그의 군사적 역량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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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자리에서
1959년 1월 1일,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게릴라의 진격을 두려워하여 도미니카 공화국으로 도피했습니다. 1월 8일, 라울과 피델 카스트로는 승리자의 자격으로 수도 아바나에 입성했습니다. 혁명의 승리는 새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고, 라울은 즉시 바티스타 정권을 지지했던 군인들의 재판을 주관하는 책임을 맡았습니다.
1959년 이후 라울 카스트로는 형인 피델 다음가는 쿠바에서 두 번째로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는 쿠바 공산당 내 요직을 맡았고, 국가 부주석과 장관을 역임했으며, 쿠바 군(무장력)을 지휘했습니다.
2006년부터 형이 심각한 건강 문제를 겪기 시작하면서 라울이 쿠바 주석직을 물려받을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이는 2008년 피델 카스트로가 쿠바 주석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현실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라울 카스트로가 국가 주석직에 오르면서, 그가 카리브해의 섬나라에 깊은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기대가 모아졌습니다.
그는 10년간 주석직을 수행하며 여러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섬에 개방적인 분위기를 조성하고, 쿠바 시민들의 일부 자유를 확대했으며, 국민이 새로운 기술에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장했습니다. 또한 특히 1960년대 미국 정부가 부과한 금수 조치(엠바고)와 관련해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적극적으로 모색했습니다.
2018년 라울 카스트로는 쿠바 주석직에서 물러나 미겔 디아스카넬(Miguel Díaz-Canel)에게 자리를 넘겼고, 쿠바 공산당 제1서기직만 유지했습니다. 2021년에는 공산당 지도부 직위에서도 사임하며 정치 일선에서 완전히 물러났습니다.
이미지 출처
[1] Harold Escalona 및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