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9년 중국 혁명은 마오쩌둥의 지도 아래 중화인민공화국이 선포되며 공산주의 세력이 중국의 권력을 장악한 역사적 사건입니다. 마오쩌둥이 이끄는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국민당과의 오랜 내전 끝에 마침내 정권을 장악했고, 이후 중국을 공산주의 국가로 변모시키는 일련의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중국 혁명의 배경
중국에서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1920년대부터 이어진 긴 권력 투쟁의 결과였습니다. 다만 이 흐름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20세기 초부터 중국에서 진행된 여러 역사적 사건들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군주제의 종말
20세기 초 중국은 군주제 국가였으며, 신제국주의 시기를 거치며 여러 열강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외세의 존재는 19세기부터 활동해 온 민족주의 운동의 성장을 촉진했고, 잇따른 반란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세기가 바뀌면서 중국 민족주의는 더욱 고조되었고, 1911년 신해혁명을 통해 만청 왕조는 권력에서 축출되며 중국의 군주제는 막을 내렸습니다.
공화국의 수립과 혼란기
군주제가 무너지면서 중국은 공화국이 되었고, 당시 중국 민족주의의 핵심 인물인 쑨원을 중심으로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임시 정부는 1912년 위안스카이에게 권력을 넘겼고, 위안스카이는 1915년부터 1916년 사이 군주제 복원을 시도하기도 했습니다.
1916년부터 1927년까지의 시기는 분리 독립 운동이 난무한 혼란의 시기였습니다. 중국 내륙의 여러 성들이 독립을 위해 싸웠고, 각 지역을 무력으로 장악한 군벌들이 자신들의 세력권을 형성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군벌에 맞서 중앙 집권을 실현하고자 하는 세력이 등장했는데, 바로 국민당(쿠오민탕)입니다. 한편 중국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불만을 안겨준 또 다른 요인은 외세 세력이 여전히 중국에 남아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공산주의의 부상
이런 격변이 진행되는 동안 중국에는 또 다른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공산주의자들입니다. 중국에서 공산주의가 힘을 얻은 것은 1917년 러시아에서 볼셰비키가 혁명에 성공한 데서 큰 영감을 받았으며, 이 시기 중국 노동 계급의 성장과도 직접적인 관련이 있었습니다.
공산주의 세력이 확대됨에 따라 1921년 7월 중국 공산당(CCP)이 창당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단 57명의 당원으로 출발했으며, 이들은 중국 노동 계급의 조직화를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초기 당원 57명 중에는 마오쩌둥도 있었는데, 그는 이후 당의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립
중국 공산당 창당 직후 몇 년간 공산당과 국민당의 관계는 비교적 평온했습니다. 주로 소련의 중재 덕분이었는데, 소련은 군벌과 싸우던 국민당에 무기와 물자를 지원했습니다. 이를 통해 공산주의자들은 국민당 조직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국민당 지도자 쑨원에게 종속되는 형태였습니다.
소련의 이러한 모순적인 태도는 스탈린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이 아직 사회주의 전환을 준비하지 못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스탈린은 이 시점의 중국 공산주의자들은 주권 확보와 외세 간섭 종식에만 집중해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양자의 관계는 1925년 장제스가 쑨원의 사망 이후 국민당의 실권을 장악하면서 급변합니다. 장제스는 군벌과의 전쟁에서 국민당을 이끌었고, 1925년부터 1927년까지의 군벌 토벌 과정에서도 공산주의 대중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중국 대도시를 중심으로 공산주의 세력이 빠르게 성장하자, 장제스는 이를 억제하기 위한 조치에 나섰습니다. 이제 군벌과 손을 잡은 국민당은 공산주의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감행했고, 이는 곧 국공 내전으로 번져갔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도시 봉기와 농촌 지역의 게릴라전을 통해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맞섰습니다. 장제스는 반공 투쟁을 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삼고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고 박해했습니다.
대장정(롱마치)
국민당군의 박해를 피한 공산주의자들은 전멸을 막기 위해 대규모 후퇴에 나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유명한 대장정으로, 1934년부터 1935년까지 진행되었습니다. 공산군은 장시성과 푸젠성에서 출발해 약 1만 킬로미터를 행군한 끝에 옌안에 새로운 거점을 마련했습니다.
중일전쟁과 내전의 중단
중국 내전은 공산주의자와 국민당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공통의 적, 즉 일본의 등장으로 부분적으로 중단되었습니다. 1930년대 일본은 극우 성향의 정부 아래 극도로 군국주의적이었고, 인접 지역에 대한 제국주의적 야망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중국은 19세기 말부터 일본 제국주의의 표적이 되어 왔습니다. 특히 1931년 만주 침략 이후 일본의 대중국 압박은 더욱 강경해졌고, 1937년 일본이 중국에 선전포고를 하면서 갈등은 전면전으로 확대되었습니다. 이것이 제2차 중일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일본의 위협으로 내전이 중단된 상태에서도 국민당군과 공산군 사이에는 소규모 교전이 계속되었다는 점을 짚을 필요가 있습니다. 양측 모두 일본의 패망 이후 대결이 재개될 것임을 알고 있었고, 상대를 미리 약화시켜 두는 것이 장래의 승리에 결정적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일본의 패배와 내전 재개
1945년 일본이 패망한 뒤,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둥은 통합 정부 수립 가능성을 놓고 회담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장제스가 공산군의 완전한 무장 해제를 요구하자 마오쩌둥이 이를 거부하면서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습니다.
협상의 실패로 중국 내전이 재개되었습니다. 장제스는 미국으로부터 강력한 지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장제스가 간과한 결정적 사실은, 공산주의자들이 중국 농촌의 농민들 사이에서 이미 크게 세력을 확장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저항 투쟁과 농민들에게 토지를 보장하는 혁명적 조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대중의 압도적인 지지를 안겨주었습니다. 잘 무장된 정규군과 민병대를 모두 합치면 공산 진영의 병력은 1천만 명을 넘어섰습니다.
중국 내전의 제2국면은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이어졌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은 점차 중국 내륙 전역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고, 국민당의 세력은 대도시로 점점 축소되었습니다. 1949년 1월, 장제스와 국민당, 그리고 중국의 대부르주아지는 대만(당시 포르모사)으로 철수했습니다.
드디어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을 공식 선포했고, 중국을 공산주의 국가로 만드는 혁명적 개혁이 그 순간부터 본격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미지 출처: Hung Chung Chih 및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