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조르주 무통, 로바우 백작 — 나폴레옹의 충직한 부관이자 프랑스 원수

조르주 무통(Georges Mouton), 로바우 백작(Comte de Lobau)
1770년 2월 21일 팔스부르(Phalsbourg) 출생 · 1838년 11월 27일 파리 별세

조르주 무통, 로바우 백작 — 나폴레옹의 충직한 부관이자 프랑스 원수
조르주 무통, 로바우 백작

의용병에서 시작된 군 경력

무통은 프랑스 혁명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뫼르트(Meurthe) 지방 의용병들의 선택을 받아 소위로 임명되면서 군인의 길에 들어섰다. 1792년 11월에는 대위로 진급했고, 이듬해에는 메니에(Meynier) 장군의 부관으로 발탁되었다. 1795년에는 라인 방면군을 떠나 이탈리아 전선으로 옮겨 주베르(Joubert) 장군의 참모로 복무했다.

제노아 공성전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였지만, 대령 계급장은 1803년에야 어깨에 달게 되었다. 1805년 초 준장으로 승진한 데 이어 나폴레옹의 부관으로 임명된 그는 1805년부터 1807년까지 이어진 전역 내내 황제 곁을 지켰으며, 프리틀란트(Friedland) 전투에서 중상을 입기도 했다.

스페인과 오스트리아 전역, 그리고 로바우 백작

곧이어 사단장으로 승진한 무통은 스페인 전선으로 파병되어 메디나 델 리오 세코(Medina del Río Seco) 전투(1808년 7월 14일)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쳤다. 같은 해 11월 황제의 소환을 받아 부관 직무로 복귀한 그는 오스트리아 원정에도 동행했다.

1809년 4월 21일 란츠후트(Landshut)에서는 불타는 다리를 수류탄병들 앞장 서서 건너며 무공을 세웠고, 5월 22일에는 근위 엽병(fusilier)들을 이끌고 에슬링(Essling)을 탈환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 로바우 섬으로의 후퇴를 엄호하던 중 손에 총탄을 맞았지만, 일주일 뒤에는 그 공로를 인정받아 로바우 백작 작위를 받았다. 바그람(Wagram) 전투에도 참전한 그는 황제를 따라 러시아 원정에 나섰다가 함께 파리로 돌아왔다.

드레스덴의 포로, 워털루의 최후

1813년 7월 근위대 총부관(aide-major général)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 11월 11일 드레스덴(Dresden)이 항복하면서 포로 신세가 되었다. 백일천하(Hundred Days) 때 나폴레옹과 재회한 무통은 다시 부관으로서 워털루 전역에 참여했다.

워털루에서 그는 플랑스누아(Plancenoit)를 끝까지 사수하며 군대의 후퇴를 엄호하는 마지막 영웅적 행보를 보였다. 이튿날인 1815년 6월 19일, 흩어진 병사들을 규합하려다 포로로 잡혔고, 이것이 그의 전장 생활의 끝이었다.

공화주의자의 정치 인생

열렬한 공화주의자였던 무통은 나폴레옹의 황제 즉위식 같은 화려한 의전조차 마지못해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부르봉 왕정에 대한 적대감을 결코 숨기지 않았던 그는 왕정복고 이후 1818년 말까지 추방 상태로 지내야 했다.

1828년 뫼르트 지역에서 하원 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자유주의 야당 진영에 속해 의정 활동을 이어갔다. 루이필리프(Louis-Philippe) 정권은 1831년 7월 30일 그를 프랑스 원수(maréchal de France)로 임명했고, 1833년 6월 27일에는 프랑스 귀족원 의원(peer de France)으로 임명했다.

유산

용맹함과 침착함, 그리고 변치 않는 충성심으로 존경을 받았던 무통. 그의 이름은 지금도 에투알 개선문(Arc de Triomphe de l'Étoile)에 새겨져 있으며, 나폴레옹 전쟁을 종횡으로 누비며 살아낸 한 명의 군인이 걸어온 길을 오늘날까지 증언하고 있다.

조르주 무통, 로바우 백작 — 나폴레옹의 충직한 부관이자 프랑스 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