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오렌지 혁명은 우크라이나에서 대통령 선거의 부정선거 의혹이 제기된 뒤 국민들의 항의 시위로 번진 사건을 가리키는 이름입니다.

2004년 오렌지 혁명은 우크라이나 정치에 큰 영향을 남긴 사건으로, 대통령 선거에서 벌어진 부정행위에 맞선 대규모 대중 시위가 그 핵심이었습니다. 국민들은 수도 키예프의 거리로 나섰고, 시민 불복종 운동은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확산되었습니다.
오렌지 혁명을 통해 새로운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고, 빅토르 유셴코가 52%의 득표율로 승리를 확정했습니다. 유셴코의 취임 이후 우크라이나 내 동서 간 분열은 더욱 심화되었으며, 러시아 정부와의 관계 역시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2004년 오렌지 혁명 한눈에 보기
- 2004년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했으며, 대규모 시위로 특징지어집니다.
- 대통령 선거에서 부정행위가 있었다는 의혹 제기를 계기로 시작되었습니다.
-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키예프 거리로 나섰고, 시민 불복종 행동이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 2004년 12월 우크라이나 최고재판소가 대통령 선거 결과를 무효로 판결하면서 재선거가 실시되었습니다.
- 야권 후보 빅토르 유셴코가 재선거에서 52%의 득표율로 승리했습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우크라이나는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독립을 쟁취했으며, 구소련을 이루었던 여러 국가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권위주의적 성격을 지닌 정부가 등장했고, 러시아 정부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동시에 우크라이나 정부는 서방 국가들과의 관계 강화를 모색했는데, 이를 위해 자유민주주의라는 겉모습을 유지하며 반(半)권위주의 정부의 실체를 가리려 했습니다. 또한 우크라이나 정부들은 독립 초기 큰 부를 축적한 러시아계 사업가 집단에게 이익을 돌려주는 방식으로 움직였습니다.
이런 사업가들은 '올리가르히(oligarchs)', 즉 과두 재벌이라 불리며, 막대한 부를 바탕으로 우크라이나 정치와 국가의 방향에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아울러 부패는 우크라이나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난 고질적인 문제였고, 초대 두 정부는 부정부패로 크게 흠집을 입었습니다. 이 정부들이 바로 레오니드 크라브추크(1991~1994) 정부와 레오니드 쿠치마(1994~2004) 정부였습니다.
날로 심해지는 사회 불평등, 만연한 부패, 권위주의 성향의 통치라는 상황 속에서 국민들은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에 급진적인 변화를 요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우크라이나 야권의 성장: 오렌지 혁명의 배경
2000년에는 레오니드 쿠치마 정부에 맞서는 야권 운동이 우크라이나에서 등장할 정치적 조건이 마련되었습니다. 이 운동에 힘을 실어준 것은 당시 나라 전체를 뒤흔든 스캔들로, 야권 언론인이 기이한 정황 속에서 살해된 사건이었습니다. 이 언론인의 이름은 게오르기 곤가제(Georgiy Gongadze)였습니다.
일부 진술은 언론인 암살이 우크라이나 정부 수반인 대통령 본인과 연관되어 있다고 지목했고, 이는 나라 전체에 분노의 물결을 일으켜 쿠치마 정부의 인기를 떨어뜨렸으며, '우리의 우크라이나(Our Ukraine)'라는 이름의 야권 운동 결성으로 이어졌습니다. 이 운동과 함께 율리야 티모셴코, 빅토르 유셴코, 올렉산드르 모로즈 같은 인물들이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야권의 성장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묵인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즉, 반권위주의 체제를 동원해 정적을 약화시키는 일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는 우크라이나 정부가 서방 국가들에게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이미지를 강화하고자 하는 관심에서 비롯된 바가 컸습니다.
이렇게 야권은 하나로 결집되었고, 2001년 빅토르 유셴코는 '우리의 우크라이나'를 정당으로 만들었습니다. 2002년에는 쿠치마 정부 쪽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전된 부정과 조작 의혹이 제기된 총선을 계기로 시민들의 항의 시위가 우크라이나 전역으로 번졌습니다.
이 시위는 실질적인 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았지만, 우크라이나 국민이 나라의 개선을 요구하겠다는 의지를 굳건히 다져주었습니다. 아울러 유셴코는 자신의 큰 시험대가 될 2004년 대통령 선거를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대통령 선거와 2004년 오렌지 혁명

야권 후보 빅토르 유셴코의 인기 상승과 2000년 언론인 피살 스캔들 이후 특히 심해진 레오니드 쿠치마의 인기 하락은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하여금 세 번째 임기 도전을 포기하게 만들었습니다. 이에 따라 쿠치마는 자신의 총리였던 빅토르 야누코비치를 후보로 내세웠습니다.
선거가 치러졌고, 개표 결과는 여당 후보의 승리로 발표되었습니다. 그러자 우크라이나 국내는 물론 국제 감시단까지 선거에서 부정행위와 투명성 부족이 있었다고 지적하는 목소리가 쏟아졌습니다. 이러한 폭로가 오렌지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수도 키예프의 거리로 나섰고, 이 시위에는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참여한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한겨울 거리에 텐트를 치고 야영하며 자신들이 싸우는 명분, 즉 부패 종식과 깨끗하고 투명한 선거 실시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시위는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고, 시민 불복종 행동은 키예프에서 우크라이나의 다른 도시들로 확산되었습니다. 또한 시위대는 주황색을 자신들의 상징 색으로 사용했는데, 이는 빅토르 유셴코 소속 정당의 색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우크라이나의 시위는 2주 넘게 이어졌습니다.
12월, 우크라이나 최고재판소는 이번 선거의 조작과 투명성 부족을 이유로 결과를 뒤집기로 결정했고, 새로운 선거가 치러져 빅토르 유셴코가 52%의 득표율로 승리하며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
오렌지 혁명의 영향
오렌지 혁명과 빅토르 유셴코의 승리 이후 우크라이나는 서방과의 관계 강화 국면에 접어들었습니다. 이는 서방과의 가까워짐을 지지하는 진영과, 문화·역사적으로 교류가 깊은 이웃 나라 러시아와의 유대 강화를 원하는 진영 사이의 국가 내 분열을 더욱 부각시켰습니다.
이러한 분열은 선거 때부터 이미 드러났습니다. 유셴코가 서방 쪽에 기울어 있었다면 야누코비치는 러시아 쪽에 가까운 인물이었습니다. 우크라이나 내 양극화에 더해 러시아와의 관계도 영향을 받았고, 특히 우크라이나가 유럽 연합(EU)과 NATO에 접근하면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마찰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치는 다시 한번 우크라이나 국민들을 실망시켰습니다. 유셴코 정부는 사회 불평등 해소와 부패 척결 같은 문제에서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유셴코 정부는 2008년 경제 위기의 강한 충격에도 시달려야 했습니다.
[1] Alexandr Zadiraka / Shutterstock
[2] Alexander Kalina / Shuttersto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