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 자유혁명은 1820년 포르투갈의 항구 도시 포르투에서 일어난 자유주의 이념에 기반한 정치 운동입니다. 이 혁명은 포르투갈의 절대왕정 타도, 주앙 6세(D. João VI)의 리스본 귀환 강요, 그리고 브라질의 재식민지화를 목표로 삼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 브라질 독립의 서막을 열었다고 평가합니다.
혁명의 시대적 배경
19세기 초 포르투갈은 역사상 가장 격동적인 시기를 맞고 있었습니다. 사회·경제·정치 전반의 혼란스러운 상황은 포르투 자유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포르투갈과 브라질 양국에 지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당시 포르투갈은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심각한 후폭풍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유럽의 모든 왕국에 영국과의 통상 관계 단절을 요구하면서 이베리아 반도의 이 나라는 난처한 입장에 놓였습니다. 포르투갈에게 영국은 가장 오랜 동맹국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프랑스 황제는 포르투갈에 영국 선박에 대한 항구 폐쇄는 물론, 런던 주재 대사의 소환, 리스본 주재 영국 대사의 추방, 포르투갈 내 영국인 체포와 재산 몰수, 나아가 영국에 대한 선전포고까지 요구했습니다.
포르투갈은 협상을 통해 상황을 타개하려 했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결국 나폴레옹은 프랑스군을 파견해 포르투갈 영토를 점령하라고 명령했습니다. 프랑스군의 접근 소식에 포르투갈 섭정 왕자 주앙은 도피 준비에 착수했고, 포르투갈 왕실은 브라질로 천도하게 됩니다.
포르투갈 왕실은 영국 함선의 호위를 받으며 1808년 2월 브라질에 도착했습니다. 주앙의 브라질 행은 주아니노 시대의 시작을 알렸으며, 이 시기 브라질은 심오한 변화를 겪게 됩니다. 왕실이 브라질에 자리 잡으면서 식민지의 현대화가 불가피했지만, 그 결과는 포르투갈에는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1808년에 이루어진 항구 개항은 상업 독점 체제에 종지부를 찍었고, 브라질 상인들에게 더 큰 자유를 보장하는 한편 포르투갈 상인들은 영국 상인에 비해 열세에 놓였습니다. 1815년에는 브라질이 왕국으로 승격되어 본국과 대등한 지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왕실이 떠난 후 포르투갈은 프랑스의 침공을 겪었고, 프랑스군 철수 후에는 영국군이 영토를 점령하고 영국인 섭정이 통치하는 어려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혁명의 동기
경제적·정치적으로 포르투갈은 왕실의 브라질 행으로 심각한 후폭풍을 겪고 있었습니다. 항구 개항과 1810년 포르투갈–영국 간 조약 체결은 포르투갈 부르주아지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고, 그들의 이윤은 급락했습니다. 상업 독점을 통한 브라질 수탈이야말로 포르투갈 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보장해 주던 원천이었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경제의 문제는 부르주아지의 낮은 이윤에만 그치지 않았습니다. 급속히 치솟는 인플레이션, 텅 빈 국고(주앙이 거의 모든 것을 브라질로 가져갔습니다), 그리고 식량 생산에 타격을 준 농업 위기까지 겹치며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부르주아지와 귀족으로 구성된 포르투갈 엘리트층은 포르투갈의 경제 문제가 브라질 재수탈을 통해 해결될 것이라 믿었습니다. 즉, 항구 개항 등 브라질에 경제적 자율성을 가져다준 조치들을 무효화하고, 1808년 이전의 방식대로 브라질을 재식민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치적으로도 포르투갈 엘리트층은 왕실의 유럽 귀환이 나라의 정치적 자율성과 독립을 보장하기 위해 시급하다고 여겼습니다. 특히 포르투갈 영토의 통치권이 영국 군인 윌리엄 카 베레스포드(William Carr Beresford) 장군에게 넘어가 있다는 사실이 이러한 감정을 더욱 짙게 만들었습니다.
더욱이 포르투갈 군대는 영국 군인들의 손에 들어가 있었고, 수많은 영국군이 포르투갈 영내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왕실의 부재는 포르투갈 엘리트층, 특히 특권을 잃은 귀족들의 불만을 증폭시켰습니다.
이처럼 경제적 문제와 정치적 자율성의 결여는 포르투갈 엘리트층으로 하여금 변화를 갈망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당시 유럽과 아메리카 전역에서 득세하던 자유주의 이념에서 영감을 받았으며, 포르투갈의 경우 다음과 같은 요구가 제기되었습니다.
- 절대왕정의 종식
- 입헌군주제 확립
- 헌법 제정
- 영국 세력 축출
- 브라질 재식민지화
브라질의 재식민지화는 반드시 자유주의 이념에 기반한 요구는 아니었지만, 포르투갈인들의 자유주의적 지향에는 명확한 한계가 있었고 그들이 자신들만의 이익을 추구했음을 보여줍니다. 앞서 살펴보았듯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브라질에 대한 수탈을 통해 나라를 회복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목표를 안고 1817년 리스본에서 리스본 음모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군부가 구상하고 고메스 프레이르 드 안드라데(Gomes Freire de Andrade) 장군이 이끈 이 음모는 진압되었고 지도자는 처형당했습니다. 1817년 운동은 실패했지만, 포르투갈 왕실의 입지가 흔들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핵심 사건들

1818년 포르투갈에서는 비밀결사인 산헤드린(Sanhedrin)이 조직되었습니다. 이 조직은 프리메이슨과 깊은 연관이 있었으며, 포르투갈 내 영국 섭정 체제의 종식과 입헌군주제 설립을 논의하기 위해 등장했습니다. 산헤드린의 멤버들이 바로 포르투 자유혁명의 주도 세력이었으며, 그들은 유럽의 다른 혁명 사례들로부터 영향을 받았습니다.
산헤드린에는 부르주아지, 귀족, 군부 등 포르투갈 엘리트층이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1820년 8월 24일, 바로 군부가 포르투에서 움직임을 개시했습니다. 그들은 시청을 점거하고 왕국 최고정부 임시 위원회라는 기구를 수립했습니다. 이 운동의 목표는 '포르투갈 국민이 유럽 각국 군주와 국민에게 보내는 선언문'이라는 문서에 담겼습니다.
포르투 자유혁명은 귀족, 부르주아지, 군부의 지지를 받았고, 곧 리스본과 포르투갈의 다른 도시들로 확산되며 운동의 파장을 키웠습니다. 참여자들은 포르투갈을 재건하겠다는 의미의 '재생(regeneração)'이라는 구호를 내걸었습니다.
포르투 자유혁명의 결과로 포르투갈 국민 특별 의회가 소집되었는데, 그 핵심 목표는 포르투갈 역사상 최초의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헌장을 통해 절대왕정의 종식과 입헌군주제의 확립이 기대되었습니다.
의회는 또한 포르투갈 헌법이 제정되는 동안 임시방편으로 1812년 스페인 헌법을 채택했습니다. 아울러 주앙 6세에게 헌법에 대한 충성 서약, 포르투갈 귀환, 그리고 브라질 재식민지화를 명령했습니다.
결과와 영향
포르투 자유혁명은 포르투갈과 브라질 양국에 커다란 결과를 남겼습니다. 포르투갈 국왕은 1821년 본국으로 귀환하여 헌법에 대한 충성 서약을 했습니다. 이로써 주앙 6세의 권한은 축소되었고, 포르투갈의 정치 변화는 강제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브라질과 관련해서는 포르투 자유혁명이 식민지의 독립 과정을 가속화했습니다. 의회의 브라질 재식민지화 강행은 큰 불만을 불러일으켰고, 브라질과 포르투갈의 분리를 주장하는 세력을 강화시켰습니다. 2년 후의 브라질 독립은 바로 이 두 세력 간 이해관계의 차이가 빚어낸 결과였습니다.
이미지 출처:
[1] StockPhotosArt 및 Shutterstock
[2] 퍼블릭 도메인 / 상파울루 박물관(USP) 소장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