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41년 4월 유고슬라비아 왕국이 분열된 뒤 세워진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의 위성국가였다. 잔혹한 파시스트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는 추축국 동맹이자 실질적인 지배자였던 독일을 지원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무력 창설을 명령했다. 그렇게 창설된 마지막 크로아티아 보병사단이 바로 제392사단이다. 이 사단은 1943년 8월 17일 편성에 착수했으며 '청색(Blue)'이라는 별칭을 부여받았다.
편성과 조직, 그리고 첫 패주
사단장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에서 복무한 베테랑 장교 요한 미클(Johann Mickl) 소장이었다. 역시 장교와 부사관 대부분은 독일인이었다. 총 3,500명의 독일인과 8,500명의 크로아티아인이 사단에 배속되었으며, 크로아티아 인원은 주로 국내방위군(도모브란) 출신이었다. 사단은 제846·847 보병('척탄병')연대, 정찰대대, 대전차대대, 공병대대, 통신대대, 근무대대, 그리고 제392 포병연대를 갖추고 있었다.
훈련은 1943년 12월까지 진행되었고, 1944년 초 사단은 자그레브와 카를로바츠에 집결한 뒤 달마티아 해안에서 크로아티아 내륙의 크닌(Knin)에 이르는 지역에 전개되었다. 사단은 카를로바츠에 주둔하던 독일 제15산악군단 예속에 들어갔다. 연합군의 달마티아 해안 상륙을 우려한 독일군 지휘부는 사단에 리예카부터 카를로바그까지 약 60km에 달하는 해안 방어 임무를 부여하는 한편, 생명선인 카를로바츠-세니 도로와 자그레브-카를로바츠 철도 노선의 경계 임무까지 떠넘겼다.
사단이 초인적인 병사들로 가득했다 해도, 빨치산이 득실거리는 지역에서 단 7개 보병대대만으로 이 모든 임무를 동시에 수행할 수 없다는 것은 불문가지였다. 1944년 1월 13일, 제847 척탄병연대는 오굴린(Ogulin) 수비대의 포위를 풀기 위해 진격했다. 그러나 전장 경험이 풍부한 빨치산을 상대로 사단의 주력을 이룬 크로아티아 국내방위군은 형편없는 모습을 보였다. 첫 교전에서 크로아티아 병사들은 공황 상태에 빠져 도주했고, 독일인들만 홀로 남겨져 싸워야 했다.
독일군의 손실은 특히 컸으며, 연대의 장교와 부사관 대부분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짧은 재정비 끝에 새로운 공격이 시도되었고, 마침내 1944년 1월 16일 오굴린의 포위가 풀렸다. 소탕 작전을 이어가던 사단은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군 제13강습사단을 격파하고 탄약과 보급품 저장소를 확보하며 명예를 회복했다.
빨치산과의 교전
이 성공 이후 제846 척탄병연대는 사단 보급선 경계 임무에 배치되었고, 제847 척탄병연대는 포병과 공병과 함께 결코 현실화되지 않을 연합군의 상륙에 대비해 해안선에 전개되었다. 빨치산은 사단을 끊임없이 괴롭혔는데, 특히 제846 연대의 진지는 이탈리아발 연합군 항공기의 공습 목표이기도 했다.
2월 말, 제847 연대는 우스타샤 대대와 함께 오굴린 남부 지역 소탕을 시도했으나, 폭설과 빨치산에 의한 보급선 차단으로 손실을 입고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3월에는 제847 연대가 빨치산이 이미 철수한 달마티아의 라브(Rab)와 파크(Pag) 섬을 저항 없이 점령했다. 같은 시기 제846 연대는 국내방위군 부대와 함께 가카(Gacka) 강 유역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사단은 담당 구역을 장악하는 데 성공했고, 오토카츠(Otočac)로 향하는 빨치산의 공격도 격퇴했다.
4월 중순, 미클 중장은 인민해방군 제13강습사단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명령했다. 공격은 제846 연대가 주력이 되어 제847 연대 일부, 사단 전체 포병, 그리고 대공포 대대의 증원을 받아 감행되었다. 빨치산은 드레즈니차(Drežnica) 마을을 보급 거점으로 삼고 있었으며, 그곳에는 무능한 추축국 동료였던 이탈리아의 항복 이후 손에 넣은 다량의 이탈리아제 무기도 저장되어 있었다.
작전은 2주간 진행되어 성공으로 끝났다. 노획한 경무기만으로도 두 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다. 여기에 소화기 탄약 30톤과 포탄 15톤까지 확보했다. 빨치산은 제35사단의 공격으로 맞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었고, 미클은 곧바로 반격에 나섰지만 뚜렷한 결과를 얻지 못했다. 한편 사단은 독일인 500명으로 증원되어 튼튼한 대대 하나를 추가로 편성했다.
종말
빨치산에게 크닌이 함락된 후, 사단은 1945년 1월 독일군 지휘부에 의해 오토카츠-비하츠(Bihac) 방어선 구축에 투입되었다. 그러나 이 방어선은 지켜질 수 없었다. 티토가 맞은편에 제4군을 집결시켜 초봄부터 맹공을 퍼붓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4월 초, 제392사단은 적의 압박 속에 서쪽으로 후퇴하기 시작해 월중순 리예카(Rijeka) 지역에 도달했다. 후퇴 도중이던 4월 9일, 사단장 미클이 머리에 총탄을 맞고 다음 날 사망하면서 사단은 지휘관을 잃었다.
4월 24일, 독일군 지휘부는 사단 내 모든 크로아티아인을 무장해제시키고 축출하기로 결정했다. 신뢰할 수 있는 소수만이 줄어든 대열에 남았고, 사단의 주력은 티토의 부대에 넘어갔다. 해산된 크로아티아인 중 일부는 빨치산의 보복으로 죽음을 맞이할 운명임을 알고 체트니크 세력과 함께 철수하던 크로아티아 부대에 합류했다. 이들은 결국 이탈리아로 후퇴해 영국군에 항복했다. 사단의 마지막 잔존 병력은 5월 7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군에 넘겨지며 그 막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