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제리 식민지화의 배경
16세기부터 알제리는 오스만 제국의 섭정 통치 아래 놓여 있었다. 그러나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위해 프랑스가 알제의 유대인 상인들에게서 밀을 구매하면서 운명의 실마리가 시작된다.
1827년, 드이 후세인(Dey Hussein)은 프랑스 영사에게 이 밀값의 지급을 요구했다. 그러나 영사의 무례한 태도에 분노한 드이는 파리채로 그를 몇 대 내려쳤고, 이 소위 '파리채 사건'은 샤를 10세가 알제리 침공의 명분으로 삼게 된다.
식민 통치 시기: 1830~1954

주요 인물
- 페르하트 압바스(Ferhat Abbas)
- 앙리 도를레앙(Henri d'Orléans)
- 루이 드 부르몽(Louis de Bourmont)
- 루이 알렉시 데미셸(Louis Alexis Desmichels)
- 토마 로베르 뷔고(Thomas Robert Bugeaud)
- 샤를 10세(Charles X)
- 조르주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 아돌프 크레뮈(Adolphe Crémieux)
-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
- 압드 알 카데르(Abd al-Kader)
- 메살리 하지(Messali Hadj)
- 드이 후세인(Dey Hussein)
- 나폴레옹 3세(Napoléon III)
식민지화의 진행 과정
1830년 6월 14일, 루이 드 부르몽이 이끄는 프랑스군은 알제 인근의 시디페루슈(Sidi Ferruch)에 상륙했다. 같은 해 7월 5일, 드이 후세인은 항복했다. 1834년에는 데미셸 장군이 에미르 압드 알 카데르와 조약을 맺어, 카데르가 '신도들의 사령관(Commander of the Faithful)'이 되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주권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프랑스측 장교들이 잇달아 교체되었고(데미셸, 트레젤, 클로젤, 뷔고), 여러 차례 조약이 체결되었다(1837년 타프나 조약). 마침내 1843년 오마일 공작이 압드 알 카데르의 본영인 스말라(Smala)를 결정적으로 함락하며 전세가 기울었다. 에미르는 1847년 항복했고, 제2공화국 시대에 알제리는 공식적으로 프랑스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저항은 끊이지 않았다. 1864년에는 울레드 시디 셰이크 지역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나폴레옹 3세가 '아랍 왕국' 정책의 일환으로 원주민 귀화를 추진했으나, 식민 정착민들의 반발로 이 구상은 좌절되고 말았다.
1870년 제3공화국 출범과 함께 알제리는 프랑스의 3개 주(département)로 분할되었고, 크레뮈 법령에 따라 알제리 유대인들에게 프랑스 시민권이 부여되었다. 한편 1871년에는 카빌리아 지방에서 엘 모크라니의 반란이 일어났고, 이를 계기로 1881년 '원주민 통치법(indigénat)'이 제정되어 원주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억압적 통치가 강화되었다. 원주민들은 그곳에 거주하는 유럽인들과 달리(1889년 6월 26일 법률) 프랑스 시민권을 누리지 못했다.
1914~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중 알제리인들이 징집된 것을 계기로, 클레망소는 1919년 개혁을 단행하여 무슬림의 선출직 대표 참여를 확대했다. 이후 인민전선 정부는 알제리 엘리트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려는 블룸-비올레트 법안을 추진했지만(1936), 역시 정착민들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독립 운동의 흐름도 이어졌다. 메살리 하지가 1926년 창설한 북아프리카의 별(Etoile Nord-Africaine)은 1929년 금지되었고, 1937년 그는 알제리 인민당을 창당했다. 같은 시기 페르하트 압바스는 알제리 인민연합(1938)을 결성하며 민족 운동의 기반을 다졌다.
1944년 3월 7일 법령을 통해 무슬림 학력 소지자들에게 완전한 프랑스 시민권이 부여되고 원주민 신분제가 폐지되었다. 또한 드골이 이끄는 프랑스 국민해방위원회는 원주민에게 동등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한 일련의 개혁을 시행했다.
식민지화의 결과와 영향
- 1830년부터 1954년까지 프랑스 본국의 잦은 정치적 불안정은 식민지에도 그대로 투영되었다. 비록 병원, 학교 등 인프라를 통한 현대화가 이루어졌지만, 원주민 통치법과 같은 수많은 조치는 지배 체제를 고수하며 진정한 의미의 동화를 결코 허용하지 않았다.
- 1945년 독일이 패망하자 알제리는 자결권 확보를 기대했지만, 지도자 메살리 하지는 오히려 투옥되었다. 1945년 5월 8일, 세티프에서 대규모 폭력 시위가 폭발했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원주민과 정착민 사이의 단절은 돌이킬 수 없게 되었고, 독립은 불가피한 귀결이 되었다. 이후 이어진 알제리 전쟁은 고문을 포함해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갔으며, 오늘날까지도 프랑스와 알제리 양국은 이 기억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