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올가 베나리오 프레스테스: 나치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은 혁명가의 생애

올가 베나리오 프레스테스: 나치 가스실에서 최후를 맞은 혁명가의 생애

올가 베나리오 프레스테스는 누구인가?

혁명가 올가 베나리오 프레스테스(Olga Benário Prestes)는 소련 공산당의 파견을 받아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Luís Carlos Prestes)의 안전을 보장하는 임무를 맡고 브라질로 향한 인물입니다.

올가 베나리오(Olga Benário)는 독일 공산당과 소련 공산당에서 두각을 나타낸 독일 출신 혁명가였습니다. 모스크바 당 조직으로부터 임무를 받아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와 함께 브라질로 건너갔고, 1935년 공산주의 폭동(인텐토나)에 참여했습니다. 그 결과 올가는 체포되어 독일로 송환되었으며, 1942년 가스실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올가 베나리오의 젊은 시절과 운동 활동

올가 구트만 베나리오(Olga Gutmann Benário)는 1908년 2월 12일 독일 뮌헨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현지 부유층 가정 출신으로, 아버지 레오 베나리오(Leo Benário)는 영향력 있는 변호사이자 독일 사회민주당의 저명한 인물이었습니다. 올가의 아버지는 도시의 빈민들을 돕는 데 힘쓰는 인사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올가가 공산주의 계열 단체와 접촉하기 시작한 것은 15세 때였습니다. 그녀는 공산주의 청년 조직과 연계된 18세 미만 청소년들로 구성된 슈바빙 그룹(Grupo Schwabing)에 가입했습니다. 1년 후인 16세 때, 올가는 연인이자 교수였던 오토 브라운(Otto Braun)과 함께 베를린으로 이주했습니다.

베를린에서 올가는 공산주의 선동 활동을 조직하고 나치당이 주도하는 극우 세력의 확산에 맞서는 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녀는 베를린 선동·선전 담당 책임자가 되었고, 이를 통해 독일 공산당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젊은 혁명가 올가는 1926년, 바이마르 공화국(1919~1933)에 대한 선동 혐의로 체포되었습니다.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는 독일 최초의 공화정·민주주의 체험이던 시기였습니다. 수감된 후 올가는 연인 오토 브라운에 관한 정보를 끌어내기 위해 끊임없이 심문을 받았으며, 1926년 10월부터 12월까지 수감 생활을 했습니다.

오토 브라운이 중대한 혐의인 반역죄로 기소되자, 올가는 독일 공산당의 지시에 따라 그가 수감되어 있던 베를린의 무아비트 감옥 습격 계획을 세웠습니다. 무아비트 감옥 습격 사건은 1928년 4월에 발생했으며, 이 사건으로 올가는 독일에서 가장 수배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검거에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자에게는 5천 마르크(당시 독일에서 약 2년 치 급여에 해당하는 금액)의 포상금이 걸렸습니다.

반역죄 혐의를 받고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올가는 가짜 서류를 사용해 소련으로 피신했습니다. 모스크바에서 그녀는 헌신적인 활동을 높이 평가받았고, 빠르게 소련 공산당의 요직으로 올라섰습니다. 그곳에서 올가는 마르크스주의 이론에 대한 지적 훈련과 군사 훈련을 함께 받았습니다.

1934년, 올가는 코민테른(공산주의 인터내셔널)으로부터 매우 중요한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 바로 혁명가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를 안전하게 브라질까지 호송하는 것이었습니다. 코민테른은 소련 공산주의를 국제적으로 확산시키는 임무를 맡은 조직이었으며,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는 콜루나 프레스테스(Coluna Prestes) 행군에서의 활약으로 브라질에서 널리 알려진 인물이었습니다.

올가의 브라질행

올가의 임무는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흔적을 남기지 않는 면밀한 브라질행 계획을 세웠습니다. 올가 베나리오는 소련에서 '올가 시네그(Olga Sinek)'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고, 여행 내내 프레스테스의 아내 행세를 하며 신혼여행을 떠나는 커플로 위장했습니다.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가 브라질에 입국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모스크바가 브라질에서 좌파 혁명을 일으키려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이 혁명은 1934년 당시 강한 대중적 지지를 받던 좌파 단체 국민해방동맹(ANL)과 브라질 공산당(PCB)이 주도해 조직될 예정이었으며, 그 목표는 게툴리우 바르가스(Getúlio Vargas) 정부의 전복이었습니다.

여행 동안 올가와 프레스테스는 가짜 서류를 들고 세계를 가로지르는 여정을 이어갔고, 위장 관계는 두 사람이 실제로 사랑에 빠지면서 진실이 되었습니다. 브라질에 도착한 프레스테스는 1935년 11월 공산주의 폭동을 조직했습니다. 이 운동에서 좌파 성향 군부의 봉기가 브라질의 세 도시, 즉 나탈, 레시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고, 프레스테스는 1936년 3월 올가와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체포되자마자 올가는 자신이 임신 중이며, 태어날 아이의 아버지가 프레스테스라고 밝혔습니다. 수감 기간 동안 그녀는 브라질 내 공산주의 조직들에 관한 정보를 대라고 여러 차례 심문을 받았지만 끝내 협조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게툴리우 바르가스는 올가를 독일로 송환하기로 결정합니다. 이는 극히 문제가 많은 결정이었습니다. 그녀는 공산주의자일 뿐만 아니라 유대인이었고, 1936년 당시 이미 독일에서 유대인들이 어떤 대접을 받고 있는지 널리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송환과 죽음

올가 베나리오는 1936년 9월 23일 라 코루냐(La Coruña)호에 실려 독일로 송환되었습니다. 배는 같은 해 10월 18일 함부르크에 도착했습니다. 올가는 게슈타포(독일 비밀경찰)에게 인계되어 곧바로 베를린 바르님 거리(Barnimstraße) 여자 교도소로 이감되었습니다.

바르님 거리 교도소에서 올가의 딸은 1936년 11월 27일 태어났고, 아니타 레오카디아 프레스테스(Anita Leocádia Prestes)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강력한 국제적 압력 끝에 독일 정부는 올가와 프레스테스의 딸을 루이스 카를루스 프레스테스의 어머니인 레오카디아 프레스테스(Leocádia Prestes)에게 넘겨주는 데 동의했습니다. 프레스테스 가족은 올가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지만, 나치 정부는 그녀의 석방을 거부했습니다.

이후 올가는 리히텐부르크, 라벤스브뤼크, 베른부르크 등 여러 강제수용소와 절멸 수용소로 차례차례 이감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녀는 나치 수용소의 만연한 참상인 강제 노동과 끔찍한 생활 조건에 시달렸습니다. 올가의 운명은 베른부르크에서 마무리되었는데, 그녀는 1942년 4월 23일 그곳의 가스실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올가 베나리오의 가족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야 그녀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이미지 출처: 360b, Shutterstock


글: 다니엘 네베스(Daniel Neves)
역사학 학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