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천도, 나폴레옹의 압박 속에서 시작된 요안니누 시대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천도는 1807년 11월 29일에 시작된 역사적 사건으로, 1808년 1월 22일 브라질 살바도르 항구에 도착하며 본격화되었습니다. 이는 나폴레옹 시대의 직접적인 결과물이자, 대륙봉쇄 문제를 둘러싼 프랑스와 포르투갈 간의 갈등이 빚어낸 결정이었습니다.

이에 따라 포르투갈 왕실은 포르투갈 정부 조직 전체와 함께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로 옮겨 그곳에 자리 잡았습니다. 이로써 역사에서 '요안니누 시대'라고 불리는 시기가 시작되었고, 브라질 항구 개방을 비롯한 일련의 변혁이 일어나며 브라질은 독립 과정으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나폴레옹 시대

왕실의 브라질 도착은 나폴레옹 시대, 특히 프랑스와 영국의 패권 다툼이 낳은 직접적 결과였습니다. 양국의 대립은 프랑스 혁명 때부터 시작되어, 1799년 브뤼메르 18일 쿠데타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프랑스의 권력을 장악하면서 더욱 격화되었습니다.

프랑스 혁명의 발발은 절대왕정의 존재 자체를 위협하는 사건이었고, 이에 유럽 군주국들은 프랑스에 맞서 연합하여 18세기 말 일련의 전쟁을 벌였습니다. 나폴레옹이 집권한 후에도 전쟁은 계속되었지만, 이제는 프랑스가 유럽 대륙 전체를 지배하려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결과 프랑스와 영국의 적대 관계는 극에 달했는데, 영국은 나폴레옹의 대륙 지배 야망을 가로막는 최대의 걸림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갈등은 유럽 전역에 파장을 일으켰고, 포르투갈 역시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친프랑스파와 친영국파 사이의 내부 분쟁은 심해져 포르투갈 정부에 개입할 정도에 이르렀습니다.

포르투갈 정부는 프랑스 혁명 시기부터 어느 한쪽의 눈 밖에 나지 않도록 중립 입장을 유지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스페인이 가까워지면서 상황은 악화되었고, 포르투갈과 스페인 간의 관계도 긴장되기 시작했습니다.

스페인과 프랑스의 접근으로 포르투갈에는 여러 요구가 제기되었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1801년 스페인과의 소규모 충돌, 이른바 오렌지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포르투갈은 올리벤사(Olivença) 지역을 스페인에 영구히 상실했습니다. 이에 섭정 주앙(D. João)은 추가 영토 상실을 막기 위해 국경 지역의 방어를 강화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왜 왕실은 브라질로 떠났는가?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천도, 나폴레옹의 압박 속에서 시작된 요안니누 시대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행은 프랑스와 영국의 다툼 속에서 포르투갈과 프랑스 사이의 위기가 심화된 결과였습니다. 1801년 오렌지 전쟁에서 패배한 이후 포르투갈과 프랑스의 외교 관계는 매우 미묘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는 포르투갈에 영국과의 외교 관계 단절을 강요했습니다.

이러한 요구는 오렌지 전쟁 패배 직후 처음 드러났습니다. 스페인의 동맹국이었던 프랑스는 항복 조건으로 영국 선박에 대한 포르투갈 항구 폐쇄를 요구했습니다. 포르투갈은 이를 수용했지만 실제로 실행하지는 않았습니다.

1806년, 프랑스는 영국을 정복하지 못했고, 강력한 영국 해군이 지키는 본토 침공에도 실패했습니다. 이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영국을 약화시키기 위해 대륙봉쇄(Continental Blockade)를 실시합니다. 이 조치로 유럽 각국은 영국 선박의 입항을 금지하고 자국 선박의 영국 항구 방문도 허용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 무렵 포르투갈은 이미 브라질로 옮겨갈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었습니다. 브라질로 천도한다면 주앙은 나폴레옹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자유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포르투갈 내 긴장감은 영국과의 동맹을 포기하길 원치 않는다는 점에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대륙봉쇄에도 불구하고 포르투갈은 계속 영국 선박을 받아들였고, 이에 나폴레옹은 1807년 9월까지 영국에 대한 일련의 제재를 이행하라는 최후통첩을 보냈습니다. 프랑스와 포르투갈은 몇 주간 협상을 벌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프랑스의 요구 중 하나는 포르투갈 내 영국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이들을 투옥하는 것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이 이 조건들을 거부하자, 나폴레옹은 브라간사 왕가를 없애겠다는 약속을 실행에 옮겨 포르투갈 점령을 위해 군대를 파견했습니다. 프랑스는 포르투갈 영토를 동맹국 스페인과 분할할 계획이었습니다.

왕실의 브라질행

포르투갈 왕실의 브라질 천도, 나폴레옹의 압박 속에서 시작된 요안니누 시대

포르투갈 궁정의 브라질 천도를 결정한 것은 포르투갈 섭정 주앙이었으며, 그 결정은 1807년 11월 24일에 내려졌습니다. 그는 정부 요인들에게 프랑스군이 4일 안에 리스본에 도달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이에 브라간사 왕가가 브라질에서도 통치를 이어갈 수 있도록 필요한 모든 것을 최대한 빨리 선적하는 준비가 시작되었습니다.

왕실은 긴급 상황 속에 출항했기 때문에 준비는 서둘러 이루어졌고, 1807년 11월 25일부터 27일까지의 승선 기간 동안 사람들을 지배한 패닉에 대한 기록이 전해집니다. 역사가들은 약 1만~1만 5천 명이 포르투갈 왕실과 함께 배에 탔다고 추산합니다.

따라서 포르투갈 궁정의 출항은 단순한 이주가 아니라 하나의 대규모 사건이었습니다. 포르투갈의 행정 체계 전체가 단 3일 만에 배에 실렸던 것입니다. 물론 극심한 혼란 덕분에 많은 짐과 기록이 남겨졌습니다. 브라간사 왕위 계승 서열에 속한 궁정 인사 중 한 명도 포르투갈에 남지 않았고, 영토는 통치 위원회에 맡겨졌습니다.

1807년 11월 29일, 포르투갈 함선들은 브라질을 향한 항해를 시작했고, 공해상에서 영국 군함을 만나 호위를 받으며 무사히 브라질로 향했습니다. 같은 날 저녁, 프랑스군은 리스본에 입성했습니다.

하지만 항해의 길은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배에 탄 인원에 비해 물자가 턱없이 부족해 식량과 물은 최대한 배급되어야 했습니다. 모두가 잘 공간도 부족해 잠자리를 임시로 마련해야 했습니다. 과밀과 위생 문제로 이(lice)가 창궐하는 사태가 벌어져 여성들은 머리를 밀어야 했습니다.

브라질의 왕실

브라간사 왕가의 브라질 도착은 1808년 1월 22일에 이루어졌습니다. 54일간의 항해 끝에 포르투갈인들은 살바도르에 도착해 며칠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이로써 브라질 역사에서 '요안니누 시대'로 불리는 새로운 시대가 열렸습니다. 살바도르에서 주앙은 브라질에 매우 중요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바로 우호 국가에 대한 브라질 항구 개방이었습니다.

이 조치는 브라질 경제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고, 브라질 무역에서 영국의 영향력을 크게 확대시켰습니다. 3월 8일, 포르투갈 궁정은 항해 중 흩어졌던 다른 선박들과 함께 리우데자네이루에 도착했습니다. 왕실의 브라질 정착은 브라질이 독립으로 나아가는 길을 앞당기는 중대한 변혁들을 가져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