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한 번쯤 드라코니안(draconian)이라는 형용사를 들어봤을 것이다. 주로 법률이나 조건을 수식하며, 스페인 왕립어사전(RAE)은 이를 '지나치게 가혹한'으로 정의한다. 하지만 이 단어의 유래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고대 그리스의 입법자 드라코(Dracon)에서 유래한 말로, 그가 기존 법전을 집대성하면서 위반 행위에 극도로 혹독한 형벌을 예고해 '엄격함'의 대명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정작 그가 직접 기여한 법 조항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전설과 역사의 경계에 선 인물
드라코의 생애는 베일에 싸여 있다. 실존 여부조차 의심받는데, 그리스어 드라콘(drakón)이 '뱀'을 뜻하고 아테네인들이 아크로폴리스에 신성한 뱀을 모셨던 점을 들어, 그가 법전의 상징적 은유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실존했다고 가정하면, 그는 기원전 7세기 중반 아티카(아테네가 위치한 에게 해 반도)의 귀족(아리스토이) 가문 출신으로 추정된다. 당시 아티카는 아직 아테네의 완전한 지배하에 있지 않았고, 귀족 가문들은 도심 밖에서 독립적인 세력을 유지하다가 나중에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참주정과 클레이스테네스의 개혁으로 아테네가 중심이 되었다.
에포니모스 아르콘과 입법 개혁의 위임
드라코는 테스모테테스(thesmothetes, 서기관 겸 판사)를 거쳐 에포니모스 아르콘(eponymous archon, 연호 관직)에 선출되었다. 이 직책은 민정과 사법을 총괄했는데, 앞서 테스모테테스 집단에 입법 개혁을 맡겼으나 실패하자 단독 책임자로 드라코를 지명한 것이다.
키론의 쿠데타와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의 몰락
기원전 632년, 아르콘 키론이 메가라의 참주 테아게네스(장인)의 지원을 받아 쿠데타를 시도했다. 귀족 지주계급(에우파트리다이)과 신흥 부상계급(데모스)의 권력 다툼을 무력으로 해결하려던 것이다. 하지만 메가라 용병을 동원해 아테네인의 반감을 샀고, 아크로폴리스로 피신했다가 항복 약속을 어기고 살해당했다. 이 과정에서 메가클레스가 신성한 장소에서 살인을 저질러 알크마이오니다이 가문 전체가 추방되었다. 이 유력 가문의 공백을 메우려 다른 귀족 가문들이 다투는 사이, 데모스는 서면 법전 제정을 강력히 요구했다.
최초의 성문법전, '드라코 법전'의 탄생
귀족들은 참주정 대신 국가의 사법 독점을 인정하는 법전 편찬에 합의했다. 기존에는 가문 간 분쟁을 관습법으로 해결해 혈투가 빈발했는데, 이를 막기 위한 조치였다. 기원전 621~620년경, 회전식 목판(나중엔 석판)인 에 새겨진 아테네 최초의 성문법전(일부에서는 최초의 헌법으로 간주)이 탄생했다.
주요 내용과 잔혹성
- 고의 살인과 과실 치사 구분
- 채무 불이행 시 노예화(채권자가 하층민이면 예외)
- 절도 등 경범죄에도 사형 선고(플루타르코스에 따르면 '더 큰 죄에 내릴 형벌이 없어서')
- 형사 책임의 가족 연대에서 개인 책임으로 전환, 고의성 중시
사법권은 아레오파고스(장로회의)가 맡았고, 살인 등 혈육 범죄는 필로바실레이스(phylobasileis, 부족장)가, 고의성 여부는 에페타이(ephetai, 51인 배심원단)가 판단했다. 원본이 소실되어 세부 사항은 불분명하다.
정치적 파급과 드라코의 추방
법전은 시민을 4개 재산 계급으로 나누고, 중무장 보병(호플리테스)에게 하급 관직 진출을 허용해 귀족 독점을 완화했다. 민중에게 유리하고 사법 자의성을 막았음에도, 형벌의 지나친 가혹함 탓에 드라코는 임기 후 실시되는 유튀나(euthyna, 직무 감사)를 거쳐 아테네에서 추방당했다. 그는 아이기나로 망명해 50세 전후로 생을 마감했는데, 열광적인 지지자들이 던진 옷더미에 질식사했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솔론의 개혁과 드라코 법전의 유산
기원전 594년, 아레오파고스는 '그리스 7현인' 중 한 명인 솔론을 아르콘 겸 디알락테스(diallaktes, 중재자)로 임명해 전권 위임했다. 솔론은 드라코 법전을 폐기(살인법만 존치)하고, 사형을 살인죄로 한정했으며, 세이사크테이아(seisachtheia, 부채 탕감 및 채무 노예 해방)를 단행했다. 아레오파고스를 보완하는 불레(Boulé, 400인 민회 선출 평의회)를 신설하고, 하층민에게 재산 요건 충족 시 공직 진출권과 시민권을 부여했다. 이로써 재산과 소득에 따른 티모크라시(참주정, 과두정과 민주정의 중간 형태)가 확립되었는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가장 순수한 정치 체제로 평가했다. 로마의 '12표법'도 아테네 사절단을 보내 이 법전을 본떠 만들었을 정도다. 드라코의 살인법 조항은 그 후 150년간 존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