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베네테스 전쟁(또는 모르비앙 전투)

모르비앙 전투는 -56년에 베네테스 함대와 로마 함대가 맞붙은 해군 대결이었습니다.

갈등의 원인

반란이 일어났고, 라벤나에 있던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갈리아가 진정되었다고 믿었습니다. Publius Crassus는 당시 Armourica의 로마 군단의 사령관이었습니다. 후자는 밀을 모으기 위해 여러 민족에게 지사와 군사 호민관을 보냈습니다. 베네티가 호민관인 퀸투스 벨라니우스(Quintus Velanius)와 티투스 실리우스(Titus Sillius)를 점령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베네티 연합군은 마르쿠스 트레비우스 갈루스(Marcus Trebius Gallus)와 티투스 테라시두스(Titus Terrasidus)를 점령했고 이것이 반란의 신호였습니다. 그 후 켈트족은 푸블리우스 크라수스(Publius Crassus)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 장교들을 석방하는 대가로 인질들을 석방해 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 반란의 원인은 의심할 바 없이 가장 강력한 해양 갈리아 민족이었던 베네치아인들이 점점 커지는 로마인들의 지배력을 희미하게 보고 그들이 자신들의 해상 세력과 경쟁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투의 첫 열매

이 사건 동안 카이사르는 라벤나에 있었습니다. 푸블리우스 크라수스(Publius Crassus)의 경고를 받은 그는 달려와 함대 건설을 명령했습니다. 실제로 베네티족은 스스로 식량을 공급했고 늪지대에 위치한 요새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Osismes, Namnètes, Ambiliates, Morins, Lexovii, Diablintes 및 Ménapiens의 동맹을 확인했으며 Brittany 섬에서도 도움을 받았습니다. 습지 때문에 요새를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로마인들에게 유일한 해결책은 바다를 통한 공격이었습니다. 배의 건조는 로마인의 동맹국인 픽턴 땅의 루아르 강둑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카이사르는 몇 개의 아모리칸 마을을 빠르게 점령했지만 베네티를 파괴해야만 반란을 종식시킬 수 있다는 것을 빨리 깨달았습니다.

켈트 선박

Caesar에 따르면 베네치아 선박은 로마 선박보다 우수했습니다. 선체가 더 평평하여 얕은 곳과 썰물에 더 적합했습니다. 선수와 선미를 높게 올려 악천후나 폭풍우가 치는 날씨에도 더 쉽게 항해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배는 나무로 만들어졌고, 닻은 사슬로 고정되었고, 돛은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게다가 이 배는 로마 배보다 더 크고 거대했으며 선체가 너무 강해서 충돌을 완벽하게 견뎌냈습니다. 가장자리도 더 높아서 취약한 위치에 있던 로마군의 총격으로부터 군인들을 보호했고, 결국 이러한 높은 가장자리는 적군이 탑승하기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로마 선박

베네치아 선박에 비해 로마 선박의 유일한 장점은 노 덕분에 더 빠르고 조종하기 쉬우며 돛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선박은 잔잔한 바다에서 특히 효과적이었고 폭풍을 잘 견디지 못했습니다.

전투 진행

로마 선박이 건조되었을 때 Decimus Junius Brutus Albinus가 지휘를 맡아 함대를 베네티 땅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길에서 로마인들은 오후 4시에 Saint-Gildas-de-Rhuys 근처에서 켈트족을 놀라게했습니다. 처음에는 선박의 우월성 덕분에 켈트족이 유리했습니다. 여러 로마 선박이 침몰했습니다. 후자는 적 선박의 밧줄을 자르기 위해 기둥에 고정 된 낫 덕분에 속임수를 시도했습니다. 이 계략으로 일부 선박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지만 승리를 거두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더욱이, 전투에 대한 전반적인 전술을 고려하지 않았던 로마인들이 퇴각을 고려하기 시작하자 갑자기 바람이 잦아들고 돛으로만 항해하던 켈트 선박들이 움직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반격을 가하여 베네치아 선박을 하나씩 파괴했지만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8시간 동안 이어진 전투는 자정에 켈트 함대의 괴멸로 끝났습니다.

결과

함대가 파괴되자 켈트족은 더 이상 싸울 수단이 없었고 항복했습니다. 승자인 카이사르는 베네치아 원로원 의원 전원을 처형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추방되어 노예로 전락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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