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카르타고의 마지막 가을 —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와 제3차 포에니 전쟁의 그림자

굴욕의 강화 조약, 잘린 사자의 발톱

기원전 202년 패배한 카르타고가 청한 평화의 대가는 가혹할 정도로 무거웠습니다. 막대한 배상금을 지급해야 했을 뿐 아니라 함대를 파괴하고 군대를 해산해야 했으며, 예전에는 자신들의 보호 아래 두었던 소란스러운 이웃 누미디아인들의 독립도 선언되었습니다. 카르타고는 로마의 허락 없이는 누미디아와 전쟁조차 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누미디아의 왕 마시니사는 고령 88세에도 불구하고 국경을 넘나들며 자신의 영토라 주장하는 땅을 약탈하는 데 여념이 없었습니다.

잿더미에서 되살아난 번영

카르타고 제국은 이제 한줄기 시냇물처럼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극도로 불리한 상황 속에서도 카르타고는 점차 부를 되찾았습니다. 주민들의 용기와 지혜, 그리고 상인들의 교묘한 수완이 그 힘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카토의 무화과, '델렌다 에스트 카르타고'

그렇다면 더 이상 크게 위협이 되지 않는 경쟁자를 기원전 150년에 갑자기 없애기로 로마가 결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오랫동안 '카토의 무화과'라는 유명한 일화가 그 답으로 제시되어 왔습니다. 기원전 152년 카르타고와 누미디아의 새로운 분쟁을 중재하기 위해 아프리카에 파견된 카토는 옛 경쟁국의 풍요로운 농업 생산력에 깊은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여행에서 가져온 보기 드문 무화과를 로마 원로원 회의장 한복판에 내보이며 적의 재건을 입증하는 증거로 삼고 외쳤습니다. "델렌다 에스트 카르타고(Delenda est Carthago) — 카르타고는 파괴되어야 한다!" 이후 2년 동안 그는 쉬지 않고 동포들을 몰아붙여 나라를 전쟁 태세로 이끌었습니다. 그래서 제3차 포에니 전쟁의 직접적 원인을 그토록 비옥한 땅을 탐내는 로마의 질투에서 찾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은 듯합니다.

민중파의 득세와 반(反)로마 감정

기원전 152년 카토가 아프리카를 방문했을 무렵, 카르타고에서는 하밀카르의 아들이자 수페테스(최고 집행관)인 기스콘이 이끄는 민중파, 곧 민주파가 권력을 쥐고 있었습니다. 그는 민중을 선동해 마시니사에 맞섰을 뿐만 아니라 로마에 대해서도 적대감을 불러일으켰고, 민중 호민관들은 도시의 미움받는 '후견인'인 로마를 격렬히 성토하였습니다.

멎지 않은 군수 공장, 퍼져나가는 위협

게다가 포에니 도시의 군사 함대는 파괴되었지만 상선 함대는 그 어느 때보다 번성했습니다. 상품으로 동부 지중해 전역을 채웠을 뿐 아니라 위협적인 사상까지 수출했고, 당시 지중해 세계를 뒤흔든 민중 봉기 곳곳에서 거의 항상 그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또한 조약에도 불구하고 카르타고의 모든 군수 공장은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카토는 과연 위험을 과장했는가

이러한 조건을 생각한다면 포에니의 위협을 과대평가했다고 카토를 비난하는 것은 오히려 잘못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의 집착 같은 구호 '델렌다 에스트 카르타고'는 로마 안에서도 일부 원로원 의원들의 반대에 부딪히다가 마침내 받아들여졌습니다. 다만 결정은 비밀에 부치기로 하고, 여론의 반발을 피하기 위해 우선 카르타고가 잘못을 저지르도록 만들기로 합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군사적 준비는 신속하게 착수되었습니다.

흔들리는 민심, 급격한 변절

한편 카르타고의 민중파는 장군들이 연달아 패배하고 군대가 마시니사에게 궤멸당하는 것을 지켜봐야 했습니다. 이윽고 로마가 동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도시는 비통에 빠졌습니다. 늘 변덕스러운 민중은 어제의 지도자들을 사형에 처하고 한노 3세 '대왕'의 친로마파 벗들을 국가의 수반으로 세웠으며, 허락 없이 전쟁을 벌인 죄를 용서해 달라며 이탈리아로 사절단을 황급히 파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