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제3차 포에니 전쟁 – 로마가 카르타고를 완전히 파괴하기까지

제3차 포에니 전쟁은 한 세기 이상 로마와 카르타고를 대립시켰던 포에니 전쟁의 마지막 국면입니다. 짧은 원정과 3년에 걸친 긴 공성전 끝에 포에니 문명의 중심 도시였던 카르타고는 완전히 파괴되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전쟁 개요

  • 기간: 기원전 149년 ~ 기원전 146년
  • 장소: 카르타고 (현재 튀니지)
  • 결과: 로마의 압도적 승리, 카르타고 멸망

교전국과 지휘관

  • 로마 공화국: 시피오 아이밀리아누스 – 병력 약 40,000명, 손실 약 17,000명
  • 카르타고: 하스드루발 – 병력 약 90,000명, 손실 약 62,000명

주요 전투는 카르타고 공성전이었으며,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로마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전쟁의 원인

이 전쟁은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보다는 로마의 깊은 불안과 경계심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당시 로마의 노령 원로원 의원이던 대(大)카토는 연설을 마칠 때마다 “델렌다 에스트 카르타고(Ceterum censeo Carthaginem esse delendam)”, 즉 “그리고 나는 카르타고가 반드시 파괴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외쳤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로마 사회에 만연했던 카르타고에 대한 적개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쟁의 직접적인 명분은 카르타고가 로마의 동맹국인 누미디아 왕 마시니사를 공격한 사건이었습니다. 로마는 이 행위가 기원전 202년 제2차 포에니 전쟁 종결 시 체결된 강화 조약, 즉 “로마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군사 행동도 할 수 없다”는 조항의 명백한 위반이라고 규정하고 전쟁을 선포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카르타고는 기원전 200년부터 149년 사이 상당한 경제적 번영을 되찾았고, 기원전 151년에는 조약에 명시된 전쟁 배상금을 모두 갚아냈습니다. 그러나 조약의 구속으로 인해 카르타고는 전쟁 함대든 대규모 육군이든 재건할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전쟁의 경과

로마 원로원의 결정으로 개시된 이 전쟁은 초기 짧은 원정 이후 곧바로 카르타고 공성전으로 이어졌습니다. 공성전은 무려 3년간 지속되었으며,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시피오(시피오 아이밀리아누스)가 이를 지휘했습니다. 그는 이 공로로 ‘소(小) 아프리카누스(Africanus Minor)’라는 별칭을 얻었는데, 이는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을 격파한 ‘대(大) 아프리카누스’ 시피오 아프리카누스와 구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군은 기원전 149년 카르타고 인근 항구 도시 우티카에 상륙하여 공성 준비를 마쳤고, 기원전 146년 드디어 도시를 함락시켰습니다. 카르타고는 잿더미가 될 정도로 완전히 파괴되었는데, 흥미롭게도 같은 해 그리스의 코린토스 역시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습니다.

훗날 카르타고 폐허에 소금이 뿌려져 다시는 도시가 일어서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가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전설로 여겨집니다. 그토록 광대한 부지에 소금을 고르게 뿌리는 작업은 막대한 비용과 오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실행되기 어려웠다는 것입니다.

카르타고의 부활

멸망한 카르타고의 땅은 영원히 버려지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123년 호민관 가이우스 셈프로니우스 그라쿠스는 옛 카르타고 부지에 5,000명의 로마 식민자를 정착시키는 법안을 제안했습니다. 이 계획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다시 추진되었고, 결국 초대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기원전 29년부터 본격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렇게 재건된 로마식 카르타고는 제국 서부에서 가장 찬란한 대도시 중 하나로 성장하여, 게르만계 반달족의 침입과 이후 아랍 세력의 도래에 이르기까지 오랜 세월 번영을 누렸습니다. 로마는 이처럼 기원전 146년에 스스로 파괴해버린 지중해 무역의 핵심 거점을 되살림으로써, 그들이 남긴 상공의 공백이라는 불편을 스스로 해소한 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