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6년 9월 25일(일부 기록에서는 9월 28일로 보기도 함), 다뉴브 강 우안(남안), 즉 오늘날 불가리아 니코폴(Nikopol) 일대에서 중세 유럽 역사를 바꾼 대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오스만 술탄 바예지드 1세(프랑스식 표기로는 '바자제트', 무라드 1세의 아들)와 세르비아 공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이끄는 군대는, 헝가리 왕 지그문트 폰 룩셈부르크가 이끌던 전례 없는 규모의 십자군을 결정적으로 격파했습니다.
전쟁의 배경
니코폴리스 전투는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를 정복해 가는 과정에서 중요한 분기점 중 하나로 꼽힙니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팔레올로고스 왕조와 칸타쿠지노스 가문이 권력을 두고 다투고 있었는데, 칸타쿠지노스 측은 1346년과 1352년 두 차례에 걸쳐 경쟁 세력을 상대하기 위해 오스만 군대의 원조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개입 당시 오스만 군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되돌아가는 대신 트라키아에 그대로 자리 잡았고, 이후 오스만 제국은 트라키아를 정복하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를 속국으로 만들었습니다.
동로마 황제 마누일 2세 팔레올로고스와 헝가리 왕 지그문트 1세는 교황 보니파시오 9세의 후원을 받아 오스만 세력을 보스포루스 너머로 밀어낼 새로운 십자군 조직을 호소했습니다. 백년전쟁의 휴전기를 맞고 있던 프랑스와 잉글랜드가 처음에는 이 호출에 응답했지만, 최종적으로 실제 병력을 파견한 것은 프랑스뿐이었습니다. 프랑스는 기사와 종사(從士) 1,000명을 포함한 약 1만 명의 병력을 보냈으며, 여기에 독일인, 알자스인, 체코인, 트란실바니아인, 왈라키아인 부대, 그리고 대수도원장 프레데릭 폰 호엔촐레른이 이끄는 튜턴 기사단까지 합류했습니다.
기독교 연합군의 주요 지휘관
이번 십자군에 참여한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장 소퇴르(Jean sans Peur, 무서운 자 장) — 느베르 백작, 부르고뉴 공 필리프 2세의 아들이자 프랑스군 총사령관
- 지그문트 1세 폰 룩셈부르크 — 헝가리 국왕
- 자크 2세 드 부르봉 — 라마르슈 백작, 카스트르 백작
- 장 드 비엔(Jean de Vienne) — 프랑스 해군 제독
- 장 2세 르 메그르(부시코) — 프랑스 원수
- 필리프 달루아 — 외 백작, 프랑스 대원수(Connétable)
- 기욤 데 보르드 — 프랑스 군기(軍旗) 수호자
- 앙게랑 7세 드 쿠시(Enguerrand VII de Coucy)
- 기 6세 드 트레무아유(Guy VI de Trémoille)
- 레노 드 로예 — 국왕 시종장
- 필리베르 드 나이약 — 로도스 병원기사단 총장
- 니콜라스 데 가라 — 헝가리 대궁내경(Palatine)
- 미르체아 1세 — 왈라키아 공
- 앙리 드 바르 — 앙게랑 드 쿠시의 사위
전투 준비 과정
헝가리와 동맹을 맺은 각국 군대는 1396년 7월 부다(Buda)에서 합류했습니다. 다만 프랑스군은 독일과 인접 지역을 통과하는 내내 약탈과 약진을 일삼아 통과 지역을 유린했고, 니코폴리스로 진군하는 길목에서 여러 마을을 점령·파괴했습니다. 특히 라호바(Rachova, 오늘날 불가리아의 오랴호보)를 함락할 때는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인질로 잡았습니다.
지그문트는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비교적 방어적인 전략을 제안했습니다. 유럽을 가로질러 온 긴 행군으로 병사들이 지쳐 있었고, 여름철 기후상 장거리 공세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에서였습니다. 그는 오스만 군이 올 때까지 기다리자며, '터키 전역을 정복하고 페르시아 제국까지 나아가겠다'는 프랑스 기사들의 야심 찬 구호에 회의적이었습니다.
왈라키아 공 미르체아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정찰 임무를 수행할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귀환 후 장 드 느베르는 그의 정찰 결과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했고, 미르체아에게 대군의 지휘권을 넘기는 안도 지그문트의 권고와 부시코, 장 드 비엔, 쿠시 등 일부 지도자들의 지지에도 불구하고 묵살되었습니다. 결국 연합군은 니코폴리스를 향해 진격했습니다.
공성전의 시작
니코폴리스는 견고한 탑과 성벽으로 잘 방어된 도시였지만, 십자군은 공성 무기를 하나도 가져오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사다리를 이용한 몇 차례의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고 지하도 굴착 공작마저 좌절하면서, 도시를 함락할 유일한 방법은 장기 포위를 통한 기아 전술뿐이라는 것이 명백해졌습니다. 그럼에도 기독교군 지휘관들은 진영 근처에서 오스만 선발 부대가 벌인 소규모 교전에도 불구하고, 여행 내내 그래왔듯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포위전 초반을 보냈습니다. 부시코는 보급 임무 중 공격을 받았다고 보고한 징발병들을 구타하거나 불구로 만들었다는 일화도 전해집니다.
주목할 점은 기독교군이 바예지드와 그의 군대의 위치를 사실상 알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일부는 술탄이 보스포루스 건너편, 심지어 지중해 너머에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바예지드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 공격 중이었고, 니코폴리스의 위급 소식이 전해지자 곧바로 구원군을 이끌고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밀라노 공작 잔 갈레아초 비스콘티가 기독교군의 동향을 오스만 측에 미리 알려주었기 때문에, 오스만 군은 정보 면에서 훨씬 유리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9월 23일에야 지그문트는 장 드 마로트 백작에게 정찰을 명령했고, 그는 귀환하여 바예지드의 군대가 십자군 진영에서 하루 행군 거리에 있는 터르노보(Turnovo)에 집결해 있다고 확인했습니다. 오스만 군의 도착 소식이 전해졌을 때, 십자군은 오늘날까지 이유가 밝혀지지 않은 채 라호바 함락 당시 붙잡아 두었던 1,000명의 주민 인질을 처형했습니다.
전투의 경과
장 드 느베르와 프랑스 기사들은 명예와 영광을 위해 기독교군의 선봉을 맡겠다고 주장했습니다. 반면 이미 오스만 군과 교전한 경험이 있는 왈라키아의 미르체아는 적의 전술에 훨씬 밝은 인물이었습니다. 지그문트는 결국 병력을 세 부대로 나누었습니다. 니콜라스 데 가라가 중앙에서 헝가리, 독일, 체코, 알자스, 플랑드르 병력 및 튜턴 기사단을 지휘하고, 우익은 스테판 라즈코비치가 이끄는 트란실바니아군이, 좌익은 왈라크(Vlach) 부대가 담당했습니다. 자신의 전략이 프랑스 기사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한 실망감을 안은 지그문트는 스스로 예비대의 지휘를 맡았습니다.
맞은편에서 바예지드는 보병 궁수(아자브)와 예니체리로 구성된 선봉을 배치했고, 그 뒤에는 적 기병의 돌격을 무너뜨리기 위해 설치한 말뚝 진지가 적을 가리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군의 주력, 특히 궁기병(아킨지)과 시파히(Sipahi) 기병, 그리고 세르비아 동맹군은 언덕 뒤에 은닉되어 있었습니다.
프랑스 기병대의 첫 돌격은 말뚝 진지에 부딪혀 말을 잃은 채 하마 전투를 강요당했습니다. 그러나 무거운 갑옷을 두른 기사들은 오스만 궁수들의 화살 세례를 버텨내고, 갑옷 없는 적 보병대를 격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오스만 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고, 프랑스 기사들은 우위를 확신히 하기 위해 후퇴하는 오스만 기병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말에서 내린 상태였던 기사들은 도주하는 적을 언덕 쪽까지 추격하다가 결국 바예지드 군의 주력과 정면으로 마주쳤습니다. 그들은 완전히 압살당했습니다. 많은 기사가 전사했고, 장 드 비엔도 그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장 드 느베르, 앙게랑 드 쿠시, 부시코, 필리프 달루아 등 프랑스의 주요 지휘관들이 포로로 잡혔으며, 수천 명의 병사도 함께 생포되었습니다.
프랑스군의 위기를 목격한 지그문트는 잘 정비된 예비대를 전투에 투입하여 균형을 되찾는 데 기여했습니다. 그러나 스테판 라자레비치가 이끄는 세르비아군이 전장에 투입되면서 승패는 오스만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지그문트는 전세가 기울었음을 깨닫고 포로가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해 베네치아 함대의 배를 타고 탈출했습니다. 전투는 끝났고, 십자군은 항복했습니다.
전투 이후: 학살과 몸값, 그리고 십자군의 종언
라호바 주민 1,000명의 처형과 이 전투에서 입은 막대한 피해에 대한 보복으로, 바예지드는 3,000명의 십자군 포로를 학살하라고 명령했습니다. 약 300명은 노예로 남겨두었고, 신분 높은 포로들에게는 거액의 몸값을 요구했습니다. 부르고뉴 공 필리프 2세는 아들 장 드 느베르를 석방시키기 위해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금액인 10만 플로린을 지불해야 했습니다. 플랑드르 기사 4명(니콜라스 우텐호베, 장 드 바르세나르, 질베르 드 뢰우르험, 트리스탕 드 메셈)을 포함한 24명의 저명한 포로 석방에 요구된 금액은 20만 두카트에 달했다고 전해집니다. 필리프 달루아나 앙게랑 드 쿠시 같은 일부 프랑스 기사들은 감옥에서, 혹은 귀환 도중에 생을 마쳤습니다.
피카르디 기사 자크 드 헬리가 패전 소식을 전하면서 프랑스와 부르고뉴 궁정은 경악에 빠졌지만, 몸값을 내고 돌아온 기사들은 진짜 영웅처럼 환영받았습니다. 한편 궁정에서는 참패의 책임을 지그문트에게 돌리거나, 왈라키아인과 트란실바니아인 같은 동맹군의 비겁함 탓으로 돌리려는 움직임이 빠르게 번졌습니다. 지그문트 본인은 자신이 소집한 십자군의 참패로 큰 타격을 입지 않았고, 오히려 1433년에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됩니다.
니코폴리스의 패배는 서유럽에게 십자군 운동의 사실상 끝을 의미했습니다. 이후에도 이베리아 반도의 완전한 해방을 위한 전투가 계속되었고 지중해에서도 충돌은 이어졌지만, 발칸의 여러 나라들은 더 이상 서유럽의 도움 없이 오스만의 정복을 막아야 했습니다. 그 결과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였습니다. 반세기 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 그리고 20세기 초까지 이어지는 오스만 제국의 발칸 지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