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고 저항하라
사절단은 고개를 숙인 채 도시로 돌아왔다. 성벽 위에서 그들을 애타게 기다리던 백성들은 곧 소식이 좋지 않음을 직감했고, 사절들을 에워싸며 질문을 쏟아냈다. 그러나 사절들은 먼저 원로원에 보고하기를 원했다. 원로원 회의가 시작되고, 군중은 밖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원로 의원들의 절망에 찬 비명을 들은 군중은 문을 부수고 회의장으로 뛰어들어, 인질과 무기를 로마에 넘기는 데 책임이 있는 원로 의원들을 그 자리에서 내려쳤다. 처참한 소식을 전한 사절들은 끌려 나가 돌을 맞았다.
역사가 아피아노스는 이렇게 기록했다. "도시 전체가 분노와 두려움, 위협의 눈물로 가득했다. 어떤 이들은 거리를 돌며 친구들을 불렀고, 어떤 이들은 신전으로 달려가 신들을 욕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무기고로 가 텅 빈 모습을 보고 절망에 울었다. 다른 이들은 항구로 달려가 넘겨 준 배들을 애도했고, 또 다른 이들은 넘겨진 코끼리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부르며 그 죄인들을 저주했다."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들은 "복수의 여신"처럼 행인을 붙잡아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항복을 생각하지 않았다. 모두가 싸우고 저항하기를 원했다. 원로원은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도시를 방어하기로 결정한다. 노예들은 해방되어 병사가 되었다. 한편 사절이 하스드루발에게 파견되었는데, 그는 마시니사와의 전투에서 패배한 장군이라는 이유로 최근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이었다. 그의 옛 적들이었던 원로원은 위기에 처한 조국을 구원해 달라고 간청했고, 그는 이를 받아들여 실추된 시절 동안 규합한 2만 명의 병력과 함께 나섰다. 그는 야전군 전체의 지휘권을 부여받았다. 또 다른 하스드루발, 즉 외할아버지가 마시니사인 인물은 도시 자체의 방어를 맡았는데, 이는 누미디아파마저 카르타고에 결속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인사였다.
신전과 궁전, 그 밖의 널찍한 건물들은 작업장으로 바뀌었고, 남녀가 밤낮없이 쉬지 않고 무기와 탄약을 제작했다. 아피아노스에 따르면 매일 방패 100개, 검 300자루, 투창 1,000개, 표창과 투창 500개, 그리고 만들 수 있는 만큼의 석궁을 생산했다고 한다. 역사가는 이렇게 덧붙였다. "상처를 감쌀 붕대가 없자, 모든 여인들이 머리카락을 잘라 밧줄을 만들었다. 그들은 또한 새로운 지출을 충당하기 위해 금 장신구를 내놓았다."
다행히 도시의 성벽은 파괴되지 않은 상태였다. 특히 카르타고를 본토와 연결하는 지협 방면의 방벽이 핵심이었다. 이 지협은 남쪽으로는 튀니스만으로 열리는 튀니스 호수와, 북쪽으로는 제3차 포에니 전쟁 당시 바다와 통하던 수크라 호수를 가른다. 육지에서 오는 공격은 반드시 삼중의 성벽을 돌파해야 했다. 도시에 가장 가까운 성벽은 높이 17미터(흉벽 아래 14미터), 폭 10미터로, 당시 기준으로는 상상하기 어려운 거대한 규모였다. 그리스의 군사 기술자 필론이 정립한 군사학 원칙에 따라 축조된 이 성벽은 벽 아래쪽에 두께 약 5.5미터, 높이 6미터의 견고한 석조 구조를 갖추고 있어 공성 충각의 충격에도 버틸 수 있었다. 남은 4.5미터 두께의 내부에는 코끼리를 수용하는 빈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상당수는 이미 로마에 넘겨진 뒤였다. 이곳에는 말들과 이 동물들의 사료 창고도 함께 들어서 있었다. 아피아노스는 코끼리 300마리와 말 4,000마리가 수용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14미터의 높이 덕분에 2층 구조를 활용해 병사들과 각종 보급품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발굴 조사에서는 성채 안에 지하 수면 아래에 물을 저장하기 위한 일련의 저수조가 확인되었다. 이 성벽 인근에도 분명 추가적인 저수조가 있었을 것이며, 더욱이 수도교가 도시 안으로 물을 공급하고 있었다. 잔석으로 축조된 이 성벽은 59미터마다 4층 높이의 돌출된 탑으로 보강되어 있었고, 꼭대기에는 순찰로가 둘러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