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나톨리 스테파노비치 디야틀로프(Anatoly Stepanovich Dyatlov)는 1986년 우크라이나 체르노빌에서 벌어진 참혹한 원자력 사고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1931년 시베리아의 극도로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북극권 도시 노릴스크에서 전기공학을 공부한 뒤 모스크바 공학물리연구소에 진학하여 1959년 졸업했다. 졸업 직후 소련 극동의 조선소로 파견되었는데, 이곳에서는 원자력 추진 잠수함이 건조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원자력 사고가 발생했을 때 현장에 있었고, 그 자신도 강한 방사선에 노출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1973년까지 이 자리에 머물렀고, 이후 건설 중이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로 발령받았다. 원자로 운영 경험을 인정받아 관리직을 맡았으며, 3호기와 4호기를 담당하게 되었다.
운명적인 밤
1986년 4월 25일, 디야틀로프는 4호기 안전시험을 총괄하고 있었다. 시험은 늦은 밤 시작되어 26일 새벽까지 이어졌다. 이 시험에는 원자로를 정지시키는 절차가 포함되어 있었지만, 원자로가 정지된 후에도 내부 핵연료의 붕괴열로 인해 핵반응이 계속된다는 사실은 충분히 고려되지 않았다. 따라서 냉각 과정을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었다. 냉각에는 비상 발전기가 사용되었지만, 발전기가 완전히 가동되기까지 최소 1분이 필요했다. 바로 이 짧은 시간 동안 원자로가 냉각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초래될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었다.
이 문제는 소련제 원자로 설계의 근본적 결함과 관련된 것으로 드러났다. 문제는 이미 알려져 있었고 1982년 몇 가지 해결책이 시도되었지만 실패했다. 그럼에도 소련은 결함 있는 원자로를 계속 가동했다. 해결책을 찾기 위한 새로운 시험이 바로 그 운명적인 밤, 체르노빌에서 진행될 예정이었다.
폭발
시험의 목적은 4호기 출력을 낮춘 상태에서 냉각용 발전기가 가동될 때까지 시스템이 버틸 수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1986년 4월 25일 저녁, 원자로 출력을 낮추는 작업으로 시험이 시작되었다. 교대 책임자는 알렉산드르 아키모프였고, 경험이 부족한 젊은 엔지니어 레오니드 톱투노프가 원자로 조작을 맡았으며, 디야틀로프가 전체를 지휘했다. 자정을 넘긴 지 몇 분 만에 출력 700MW까지 감소에 성공했지만, 톱투노프의 실수로 출력이 통제 불능으로 더 떨어져 30MW까지 곤두박질쳤다.
결국 기술진의 개입으로 출력이 200MW까지 올려졌지만, 이 무렵부터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30분 넘게 위험 신호가 무시되었고, 그럼에도 시험은 강행되었다. 오전 1시 23분, 발전기와 냉각계통을 연결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회마저 놓치고 말았다. 원자로는 이미 불안정한 상태로 출력을 통제할 수 없이 치솟고 있었다. 원자로를 완전히 정지시키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앞선 실수들과 열악한 설계 탓에 불가능했다.
제어봉으로 사용된 붕소카바이드 봉에는 흑연 헤드가 달려 있었다. 이 때문에 원자로 정지 직전의 짧은 순간 오히려 출력이 급증했다. 즉, 흑연이 체르노빌을 폭파시킨 뇌관이 된 셈이다. 이 흑연 끝단 문제는 1983년부터 알려져 있었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다. 제어봉이 중성자를 흡수하는 대신 출력을 폭증시키면서, 정격 3,200MW인 원자로의 출력은 무려 33,000MW에 달했다!
그리고 첫 번째 폭발이 일어났고, 몇 초 뒤 더 강력한 두 번째 폭발이 뒤따랐다. 산산조각 난 원자로 심장부와 함께 대량의 방사성 물질이 분출되어 유럽 전역으로 서서히 퍼져나갔다. 이 참사의 주요 원인은 결함 있는 RBMK-1000 원자로, 일부 인적 오류, 그리고 시스템 경보에도 불구하고 시험 강행을 밀어붙인 디야틀로프의 고집이었다.
디야틀로프의 최후
폭발 당시 디야틀로프는 치명적인 수준의 방사선을 받았지만 살아남았고, 사고의 주범으로 재판에 회부되었다. 이는 한 사람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고 '인적 오류'라는 명분으로 사고를 덮어, 결함 있는 원자로에 대한 본질적 심판을 피하려는 정치적 결정이었다. 디야틀로프는 1987년 징역 10년을 선고받았으나 1990년 특사로 석방되었다.
1991년 그는 자신과 부하들의 책임을 면죄시키고 사고의 원인을 전적으로 설비 고장에 돌리는 책을 출간했다. 그러나 그 역시 경고 신호를 무시했을 뿐만 아니라, 시험 중단을 요구한 아키모프 같은 직원들에게 해고를 들먹이며 협박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반면 국제원자력기구(IAEA)는 체르노빌 사고 원인에 대한 자체 조사에서 디야틀로프의 견해를 받아들여 결함 있는 원자로에 책임을 돌렸다. 체르노빌에서 살아남았던 디야틀로프는 결국 방사선 피해의 후유증으로 1995년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