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킹, 그 진짜 모습을 찾아서
약 800년부터 1050년경까지 서양의 역사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스칸디나비아 항해자들, 곧 바이킹. 이 글은 그들의 실제 모습을 복원하는 데 목적이 있다. 공포의 상징으로만 알려진 이들은 과연 어떤 배를 탔고, 어떤 항로를 따라 움직였으며, 왜 약탈자가 되었고, 또 왜 사라졌을까?
뛰어난 기술력이 담긴 배
여러 가지 이유로 미루어 볼 때, 스칸디나비아인들은 태초부터 훌륭한 뱃사람이자 영리한 상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유명한 배—크노르(knórr), 스키드(skeid), 스넥야(snekkja) 등이 있으며, 결코 '롱십(longship)'이라 불리지 않는다—은 비교적 이른 시기인 6~7세기에 이미 설계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배의 기술적 특징은 당대 기준으로 보기 힘든 수준이었다. 판재를 서로 겹쳐 이은 클린커(clinker) 방식의 좌우 대칭 선체, 얕은 흘수를 보장하는 통짜 용골, 특수한 보(beam)에 고정되어 일정한 가동성을 지닌 중앙 돛대, 직사각형 돛 한 장, 그리고 부드러운 가죽 끝줄로 고정된 짧은 노 형태의 우현 선미 키 등이 그것이다. 빠르고 민첩하며 거의 무적에 가까운 이 배는 바이킹 활동의 물리적 기반이라 할 수 있다.
네 갈래의 무역로
800년 이전에도 북방의 상인들은 이미 정착 거점을 세운 고정 항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주요 항로는 적어도 넷이다.
첫째, 발트해 내부 항로. 호박과 모피·가죽의 산지를 잇는 내륙성 항로였다. 둘째, 북방 항로(nordrvegr). 노르웨이 남부에서 노르카프(North Cape)를 거쳐 무르만스크, 백해까지 이어지며 역시 모피와 가죽을 실었다. 셋째, 서방 항로(vestrvegr). 가장 잘 알려진 항로로 세 가지 변형이 있었다. 잉글랜드와 아일랜드를 향한 정서 방면, 네덜란드·프랑스·스페인 연안을 따라 연안 항해(cabotage)를 하며 지브롤터 해협을 통해 비잔티움까지 도달할 수 있었던 경로, 그리고 강과 호수를 따라 이탈리아 북부로 남하하는 길이었다. 넷째, 동방 항로(austrvegr). 주로 스웨덴인들이 이용했는데, 발트해 극동에서 출발하여 러시아의 강과 호수를 따라 비잔티움까지 내려갔다. 이 역시 흑해로 가는 직항로와, 카스피해를 거쳐 타슈켄트·사마르칸트·부하라·바그다드에까지 이르며 극동에서 온 두 개의 대상(隊商)로를 가로지르는 동쪽 경로로 나뉜다.
이 항로들에서 오간 것은 소량의 사치품, 와인과 향신료, 꿀, 세공된 무기, 유리제품, 그리고 무엇보다 노예였다. 노르드인들은 노예 무역을 대규모로 행했던 것이다. 이 항로들을 점차 체계화한 것이 바이킹이지만, 그 자체는 그들보다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 있었다.
상인에서 약탈자로
이 상인들이 포식자로 변신하기 위해서는 8세기 말 이전에 나타난 두 현상의 결합이 필요했다. 하나는 거대한 카롤링거 제국의 분열이었고, 다른 하나는 711년 아랍 세력이 지브롤터 해협을 장악하면서 지중해의 동서 교류가 차단된 사건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어떤 수단을 동원해서든 부를 축적하는 것(용병으로 활약한 사례도 있으나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지 않다)이거나, 더 온화한 기후와 비옥한 토지를 찾아 정착하는 것이었다. 잉글랜드의 데인로(Danelaw), 아일랜드 남부, 프랑스의 노르망디, 아이슬란드, 그리고 노브고로드(Hólmgardr)와 키예프(Kænugarðr) 공국—이 두 공국은 후에 통합되어 '러시아' 국가의 기원이 된다.
이로써 바이킹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어두운 명성은 오로지 그들의 전술과 먹잇감의 성격에서 비롯된다. 스칸디나비아인들은 놀라운 신속함과 무시무시한 효율성으로 기습 작전을 구사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듯 그들은 방비가 허술한 순간—예컨대 지역 축제일—에 수도원, 대수도원, 소수도원, 무방비 도시 등을 덮쳐 조직적으로 약탈하고 불을 질른 뒤, 빠르고 가볍고 거의 무적의 배를 타고 즉시 사라졌다. 이것만으로도 확고한 공포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흥미로운 점은 그들의 공격 대부분이 교회의 재산을 겨냥했고, 필을 들 줄 아는 사람이 거의 성직자뿐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결과 우리는 그들이 남긴 전율에 젖은 연대기와 기괴한 연보, 즉 과장과 과장된 표현으로 현실이 왜곡된 기록들을 물려받았다. 성직자들의 눈에 바이킹은 사탄의 하수인이었고, 이 이미지는 오늘날까지 그 위력을 완전히 잃지 않았다.
바이킹 운동의 단계와 종언
이 현상에는 몇 가지 뚜렷한 단계를 구분할 수 있다. 800년부터 850년까지는 시행착오의 시기로, 스칸디나비아인들이 서방의 취약성을 인식해 가던 시절이다. 850년부터 900년까지는 담대한 지도자들이 파리나 런던 같은 도시를 포위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으면서 본격적인 약탈이 이루어진 시기다. 900년부터 980년까지는 식민화 단계가 시작되었고, 마지막 여파—주로 덴마크인들에 의한 것—는 980년에서 1050년 사이에 더 큰 규모의 이동으로 나타났지만, 연대기가 묘사하는 것만큼의 규모는 아니었다.
바이킹 운동은 결국 스스로 막을 내렸는데, 그 이유는 본질적으로 두 가지다. 첫째는 950년에서 1050년 사이 북유럽의 기독교화였다. 이는 다른 결과와 함께 노예 무역이라는 그들의 주요 수입원을 말려 버렸다. 둘째는 내부적 요인으로, 스칸디나비아 각국이 강력한 중앙집권 권력과 세금 징수를 갖춘 '남방식' 국가로 조직되면서 독립적인 '바다의 왕'들의 움직임이 끝났다는 것이다. 바이킹들은 이제 왕에게 수익의 몫을 바쳐야 했다.
문명의 기반 위에서
바이킹 운동은 그것을 떠받쳐 준 문화와 문명 없이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노르드인들은 고유한 종교적·윤리적·사회적·정치적 전통을 지녔다. 질서와 조직 능력을 갖춘 바이킹들은 땅의 발견자이자 식민 개척자였을 뿐 아니라, 입법자이자 유능한 행정가이기도 했다. 12세기에서 14세기에 걸친 '아이슬란드의 기적'과 그 이후의 역사는 이를 충분히 증명해 준다.
'북방의 신화'와 낭만주의
주목할 점은 바이킹, 더 정확히는 '바이킹 신화'가 소위 '북방의 신화(myth of the North)'에 속한다는 사실이다. 이 신화는 수많은 오해를 낳아 왔다. 1세기 말 타키투스는 『게르마니아』에서 타락한 로마의 무기력을 비난하기 위해 순수하고 강건한 게르만을 찬양했다. 7세기의 요르다네스는 『게티카(Getica)』에서 스칸디나비아를 '민족의 요람(vagina nationum)', '민족의 공장(officina gentium)'으로 묘사했다.
17세기에는 스웨덴의 요하네스 마그누스와 올라우스 마그누스가 모든 문명의 기원을 스웨덴 혹은 북방에서 찾았고, 18세기에는 그들의 동포 올로프 루드베크가 저서 『아틀란티디스(Atland sive Manhem)』에서 아틀란티스와 엘도라도까지 자기 나라 안에 위치시켰다! 역사 속에서 오랫동안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작은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800년에서 1050년 사이의 비할 데 없는 영광의 시절을 기억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는 반사 작용이며, 바이킹 신화의 일차적 책임은 그들에게 있다.
이후 북방의 낭만주의자들—덴마크의 외렌슐레게르, 스웨덴의 테그네르와 게이예르—은 자유의 애호가이자 바다의 길들이기, 서양의 재생자, 기사도의 선조(꽤 의외지만)로서의 바이킹을 열광적인 어조로 찬양했고, 그는 마침내 니체적 초인으로까지 격상되었다. 우리 시대의 낭만주의는 이러한 관점을 한층 더 부풀렸다. 여기서부터 용기의 화신, 죽음을 경멸하는 건강한 야만인을 노래하는 삽화·조각·회화·벽화의 홍수가 쏟아져 나왔다. 바그너적 세계관과의 끊임없는 혼동이 이 이미지를 완성했고, 오늘날에도 폭풍을 웃어넘기는 거친 사나이가 만화와 영화 속에서 활약한다. 불과 피, 관능과 죽음, 자주색과 황금, 발키리와 이리, 까마귀… 바이킹은 시대를 거듭하며 우리 문학과 예술의 열정의 척도가 되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