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르티아인은 인도·이란계(인도이란어파) 출신의 기마 민족으로, 카스피해와 아랄해 사이, 당시 셀레우코스 제국의 한 주였던 '파르티아네(Parthyene)' 지역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들은 스키타이인의 친족 집단을 이루던 여러 부류 가운데 하나인 파르니(Parni) 족에 속했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란어에서 그 명칭은 '전사', '기수'를 의미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파르티아인은 약 5세기에 걸쳐 이란 세계 전역에 권위를 행사했지만, 안타깝게도 그 문명에 관해 남아 있는 자료는 그리스·로마 계통의 역사서술 외에는 극히 드물다. 이 때문에 파르티아 제국은 오늘날까지도 고대 세계에서 가장 베일에 싸인 제국 중 하나로 남아 있다.

아르사케스 왕조의 건국 — 기원전 247년
기원전 247년, 아르사케스(Arsaces)와 티리다테스(Tiridates) 형제는 셀레우코스 왕조가 쇠퇴하고 있던 틈을 타 파르티아네를 장악했다. 그리고 오늘날 이란의 담간(Dâmghân) 인근에 위치한 헤카톰필로스(Hecatompylos)에 수도를 세우며 사실상의 독립을 이루었다. 이로써 이후 약 5세기를 이끌 아르사케스 왕조의 시대가 개막되었다.
서방에서의 팽창 — 셀레우코스와 로마와의 대결
서쪽에서 파르티아인들은 셀레우코스 왕조와 끊임없이 충돌했고,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장악한 로마가 새로운 강적으로 등장하자 이들과도 격렬하게 맞섰다. 기원전 2세기 말에는 제국의 영토를 아르메니아 방면까지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
특히 기원전 53년 카레(Carrhae) 전투에서 파르티아 기병대는 크라수스가 이끄는 로마군을 궤멸시키며 '무적의 로마' 신화에 균열을 냈다. 이 전투로 유명해진 것이 후퇴하는 척하며 등 뒤로 화살을 쏘는 소위 '파르티아 사격(Parthian shot)'이라는 전술이다.
동방에서의 팽창 — 인도-파르티아 왕조
동쪽에서는 서기 초기 무렵, 파르티아인들이 사카(Saka)족이 지배하던 지역을 침공했다. 아제스 1세(Azès I)의 통치 아래 시작된 이 정복 사업은 아들 아질리제스(Azilizès), 이어 손자 아제스 2세(Azès II)로 왕위가 계승되면서, 수도를 탁실라(Taxila)에 둔 새로운 인도-파르티아 왕조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유연한 통치 — 봉건적 제국의 구조
파르티아인은 그 수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메소포타미아 전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정복한 주민들을 관용적으로 다루고, 기존의 제도를 그대로 활용하며, 속왕국(vassal kingdoms)의 존재까지 용인하는 유연한 통치 방식을 채택해야 했다.
파르티아 제국은 본질적으로 봉건 국가였다. 제국의 결속력은 각지의 속후(屬侯)들이 중앙의 군주에게 바치는 충성심에 기반했으며, 이는 곧 제국의 강점이자 동시에 가장 큰 약점이 되었다.
멸망 — 외부의 적이 아닌 내부의 반란
그 결과, 파르티아 왕조의 최종적인 몰락은 외부의 침략이 아니라 제국 내부에서 일어난 반란에 의해 초래되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바로 파르티아를 대신할 새 세력, 사산조(Sassanids)였다. 서기 224년 아르다시르 1세가 파르티아의 마지막 군주를 격파하면서, 약 5세기에 걸친 아르사케스 왕조의 시대는 막을 내리고 페르시아의 주도권은 사산조 페르시아로 넘어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