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레바테스(Atrebates)는 갈리아의 여러 부족 가운데 하나로, 부족 이름은 문자 그대로 '거주자들'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이들은 오늘날 프랑스의 아르투아(Artois) 지방에 해당하는 '아트레바티에' 지역에 거주했으며, 수도 네메토켄나(Nemetocenna)는 현재의 아라스(Arras)로 이어진다. '네메토켄나'라는 이름은 '성소에 속한 땅, 성역의 나라'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기록한 아트레바테스
『갈리아 전쟁기』에서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아트레바테스를, 게르마니아에서 기원하여 기원전 4세기부터 2세기 사이에 갈리아 북부로 진출한 벨기에 계열 부족과 연관 짓는다. 아트레바테스는 이러한 민족 대이동의 한 과정에서 아라스 일대에 정착하여 도시 네메토켄나를 세운 것으로 여겨진다. 고고학적으로는 이들을 다뉴브 지역 출신 켈트족(Danubian Celts)과 대응시키는데, 곧 기원전 3세기에 이동하던 켈트 민족의 후손이면서 기존의 켈트 문화 기반과 융합된 집단이라는 것이다.
카이사르는 벨기에 연합군에 1만 5,000명의 전사를 지원했다는 기록을 통해 아트레바테스를 처음 언급한다. 기원전 57년 사비스 강 전투(Battle of the Sabis)에서 아트레바테스는 네르비이족(Nervii)과 비로만두이족(Viromandui)과 함께 로마 군단과 맞서 싸웠으나, 제9군단과 제10군단이 담당한 로마군 좌익에게 패배하고 만다.
이 패배 이후 아트레바테스는 카이사르의 사업에 협력하는 국면으로 접어든다. 카이사르는 코므미우스(Commius)라는 인물을 효과적인 동맹자로 삼았다. 기원전 55년 아트레바테스의 왕으로 임명된 코므미우스는 카이사르의 명을 받아 브리튼으로 파견되어 남부 부족들이 로마에 복속하도록 설득하는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 이 임무를 성실히 완수한 공로로 카이사르는 아트레바테스를 정복민에게 부과하던 공납에서 면제시키고, 그들의 법률과 제도를 회복시켜 주었다.
그러나 기원전 52년 갈리아 전역의 대반란이 일어나자 코므미우스는 갈리아 진영에 기울었고, 이 때문에 카이사르의 부관 티투스 라비에누스(Titus Labienus)가 배후가 된 암살 시도의 표적이 되었다. 코므미우스는 4,000명의 전사를 이끌고 알레시아로 향해 베르킨게토릭스(Vercingetorix)의 독립 투쟁을 지원했다. 그러나 이 시도도, 벨로바키족의 지도자 코레우스(Correus)와 맺은 동맹도 실패로 돌아갔고, 코므미우스는 결국 게르마니아로 피신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이탈에 대한 대응으로 로마군은 아트레바티에에 주둔하며 현지의 잠재적 반란을 경계하고 새로 확보한 영토를 통제하게 되었다.
브리튼의 아트레바테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 이후, 코므미우스는 갈리아 아트레바테스 부족의 왕으로 옹립되었다(앞 절 참조). 카이사르의 특사였던 그는 브리튼에 파견되어 그곳의 여러 부족들과 관계를 맺었다.
참여했던 베르킨게토릭스의 반란 이후, 코므미우스는 브리튼으로 피신했다. 그가 자신의 수도 칼레바(Calleva, 오늘날의 실체스터 Silchester)에서 발행한 주화를 바탕으로, 학자들은 그가 기원전 40년경 그곳에 새로운 왕국을 세웠다고 추정한다.
그의 뒤를 이어 세 아들이 차례로 권력을 분할·계승했다. 첫째 틴코마루스(Tincomarus)는 처음에는 아버지와 공동으로 통치하다가 이후 왕국 북부를, 에필루스(Eppillus)는 남부를 각각 다스렸으며, 마지막으로 서기 10년경에는 베리카(Verica)가 왕위에 올랐다.
아트레바테 왕국은 북동쪽 이웃인 카투벨라우니족(Catuvellauni, 수도는 베룰라미움 Verulamium, 오늘날의 세인트올번즈 St Albans)과 그들의 왕 카라타쿠스(Caratacus)에게 정복당했다. 베리카가 로마로 망명한 사건이 로마의 브리튼 정복(서기 43년)의 동기 가운데 하나였을 가능성도 있다.
정복 이후 아트레바테의 영토는 서기 43년부터 약 80년경까지 코기두브누스(Cogidubnus)의 왕국에 편입되었다. 대체로 이 시기를 전후하여 그 도시는 무니키피움(municipium) 단계로 승격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