켈트계 갈리아 부족, 트레베리
트레베리(Treveri)는 켈트 민족 중 하나로, 벨기카 갈리아에 속한 갈리아 부족이었다. 이들의 광대한 영토는 오늘날 벨기에 룩셈부르크 지방, 룩셈부르크 대공국, 그리고 독일 모젤강 하류 일대에 걸쳐 있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의 항쟁
트레베리의 왕 인두티오마루스(Indutiomarus)는 수년간 율리우스 카이사르에게 큰 골칫거리였으며, 이들은 기원전 52년에야 비로소 로마에 복속되었다. 그러나 그 후 한 세기 동안에도 트레베리인들은 산발적으로 반란을 일으키며 로마의 지배에 끊임없이 저항했다.
게르만인인가, 갈리아인인가
흥미롭게도 카이사르는 트레베리인들을 게르만인이라 불렀다. 그것이 그들이 입은 바지(braccae)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언어 때문이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다만 3~4세기에는 적어도 수도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Augusta Treverorum, 프랑스어로 트레브 Trèves, 독일어로 트리어 Trier)에서 통용되던 언어는 갈리아 방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성 제롬은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소아시아의 갈라티아인들, 즉 델포이 원정을 나섰던 브렌누스 원정대의 생존자이자 켈트 갈리아인의 후손들과 트레베리인이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증언하였다. (Jean Markale, 『The Celtic Woman』, Petite Bibliothèque Payot, Paris, 1989, p.53)
로마 제국의 요충지, 트리어
같은 시기,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개혁에 따라 트리어는 서로마 제국을 이끌 후계자로 임명된 '카이사르', 즉 부황제의 수도가 되었다. 그 뒤를 이은 카이사르 중 한 명인 콘스탄티누스 1세 역시 여러 해 동안 트리어에 머무르며 거주했다.
뛰어난 농업 기술과 말 사육
로마 시대의 트레베리인들은 매우 뛰어난 농부였다. 당나귀가 앞에서 밀어주는 방식의 수확기를 개발했는데, 이 기계는 부조(bas-relief)로 묘사되어 전해지며 고고학자들이 1950년대에 실물을 복원하고 실제로 작동시키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다만 이 부조가 해당 농기계의 유일한 증거인 만큼, 널리 보급되지는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울러 트레베리인들은 말 사육으로도 널리 명성을 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