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터무니없다는 '제한적 우선권'
아이젠하워가 공수 작전에 실제로 배정하려 했던 '제한적 우선권', 즉 추가 물자와 수송 수단의 형태로 제공되는 지원은 데ンプ시와 몽고메리 두 장군에게는 터무니없이 불공정한 처우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반면 미국 측은 영국군에게 그조차도 정당화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군 자신도 물자나 수송 면에서 필요한 만큼 다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아이젠하워가 안고 있는 정치적 문제를 그다지 달게 여기지 않았던 몽고메리는 끝내 자신에게 '전체(total)' 우선권이 주어져야 한다고 고집스럽게 주장했습니다.
바닥난 수송 능력
이미 제21군단(Army Group XXI)의 모든 수송 예비력은 동원된 상태였습니다. 본국에서 새로운 수송 중대들이 파견될 것으로 약속받았지만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활주로를 옆에 붙인 탱크 수송선마저 필수 보급품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결국 육군의 대포병과 대공포 대부분은 오랫동안 창고에서 출발을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낙하산 부대가 교량들을 확보하는 즉시 제2군 선두에서 진격해야 했던 호록스(Horrocks) 장군의 군단은, 패튼이 남쪽으로 진격하는 한 미 제1군의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우익에서 영국 제8군단의 지원을 받아야 했지만, 이 제8군단의 수송 수단 대부분은 이미 제2군의 다른 부대들에 배속되어 있었고, 미국이 약속한 추가 수송력으로는 부족분을 메울 수 없었습니다.
작전 연기 통보와 아이젠하워의 신속한 대응
결국 9월 11일, 몽고메리는 아이젠하워에게 예정된 9월 17일에는 공수 작전을 실시할 수 없다고 보고했습니다. 그는 공격을 하루빨리 잡아도 21일로 연기할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지연 때문에 "더 강한 저항에 부딪히고 더 적은 성과를 거두리라"는 것도 각오해야 한다고 경고했습니다.
이 노골적인 경고는 효과를 거두었습니다. 아이젠하워가 이 보고를 받은 다음 날, 그의 참모총장은 비행기를 타고 몽고메리의 전술지휘소(P.C.)를 찾았습니다. 그가 가져온 것은 상당한 양보였습니다. 미군 트럭 중대 여러 개의 도착 약속, 브뤼셀에 대한 하루 1만 5천 톤의 보급 약속, 자르(Saar) 방면 돌파의 연기, 그리고 제12군집단 보급물자의 대부분을 호지스(Hodges) 장군의 미 제1군에 배정한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미 제1군은 작전이 발동되는 즉시 우익에서 제30군단을 원하는 대로 지원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아이젠하워가 몽고메리의 선언에 이토록 신속하게 반응한 데에는 절박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바로 안트베르펜 항구를 확보하고 싶은 간절한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이 항구는 스헬더 강 어귀 양안의 해상 쪽에서 아직 독일군에 의해 봉쇄되어 있었고, 몽고메리의 작전이 하루 늦어질 때마다 독일 본토 깊숙이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이 항구의 사용도 함께 늦어지는 셈이었습니다.
계산을 깨버린 패튼의 '독주'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끓어오르는 패튼(Patton)이라는 변수를 계산에 넣지 못했습니다! 준비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기가 무섭게 패튼은 자신의 부대가 모젤 강과 그 너머에서 심각하게 교전 중이라고 보고해 왔습니다. 단순히 '지속적인 정찰을 수행한다'는 허가만 받아낸 패튼은, 스스로 인정했듯이 이 명령을 구실로 삼아 "정찰을 빌미로 삼고, 그 정찰을 증강한 뒤, 마침내 그것을 공격으로 전환했다"고 합니다. 물론 그것은 확보한 연료와 탄약의 양에 따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의 휘하 장교 하나가 지적했듯이, 패튼은 "아낌없이 제 것처럼 써 버렸습니다."
독일군에게서 탈취한 45만 리터가 넘는 휘발유 확보 사실은 아이젠하워에게 숨겨졌으며, 심지어 패튼 군의 어떤 장교들은 자신을 제1군 소속으로 둔갑시켜 "이 대부대의 창고에서 상당량의 연료를 뽑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이야기까지 돌았습니다.
브래들리(Bradley)도 암묵적으로 패튼을 도왔습니다. 제12군집단의 보급물자를 호지스 장군의 미 제1군, 즉 몽고메리의 작전을 지원할 부대에 우선 배정하라고 규정한 아이젠하워의 명령은 결국 무시되고 말았습니다.
기대에 못 미친 미군의 지원, 그리고 되살아나는 국방군
현실적으로 영국군 작전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금세 미미한 수준임이 드러났습니다. 호지스가 프륌(Prüm) 인근에서 독일 국경을 넘나들 무렵, 그는 모젤 강 반대편에서 패튼이 맞닥뜨렸던 것에 필적하는 격렬한 독일군의 저항과 마주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9월 내내 연합군 전 전선에서 독일군의 저항은 나날이 강경해지고 있었습니다. 서부전선의 새 사령관 모델(Model)은 4일 퓌러에게 "이 불평등한 싸움은 더 이상 지속될 수 없다"고 보고했지만, 이후에는 마음을 다잡은 듯 보였습니다. 국방군은 과거의 위력을 조금씩 되찾아 가고 있었고, 공수 작전의 실시를 미룰수록 성공 가능성은 그만큼 줄어들 뿐이었습니다. 한편 런던에서는 이미 공수군 참모부가 이 기동의 실행 방안을 검토하기 시작한 상태였습니다.
작전에 동원될 네 개 사단과 우르쿠하트 장군
이 작전을 위해 네 개 사단, 즉 영국군 두 개 사단과 미군 두 개 사단이 준비되어 있었고, 여기에 소사보프스키(Sosabowski) 장군 지휘 아래 독립 폴란드 여단 하나가 더해졌습니다.
미군의 두 사단은 개빈(Gavin) 장군의 제82공수사단과 테일러(Taylor) 장군의 제101공수사단이었습니다. 영국군의 두 사단은 하나는 헤이크웰-스미스(Hakewell-Smith) 장군이 지휘하는 제52사단, 다른 하나는 우르쿠하트(Urquhart) 장군이 지휘하는 제1공수사단이었습니다.
미국의 동료들과 달리 우르쿠하트 장군은 공수부대에서는 비교적 새로운 얼굴이었습니다. 큰 체구에 활기 넘치고 인망이 두터웠던 그는 42세의 스코틀랜드인으로, 북아프리카, 시칠리아, 이탈리아에서 용맹하게 싸운 전력을 지닌 지휘관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자신의 말대로, 9개월 전 자신이 사단장에 임명되었다는 통보를 받고 가장 놀란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비행 멀미를 앓고 있었고, 평생 낙하산으로 뛰어본 적도 글라이더로 착륙해 본 적도 없었습니다. 낙하산 훈련이라도 좀 받으면 어떻겠느냐는 물음에는, "당신의 임무는 유럽 침공을 준비하는 것이지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며, 게다가 당신은 너무 거물이고 너무 늙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