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삼총사의 트레빌, 실존 인물 장 아르노 뒤 페레르 백작의 파란만장한 생애

삼총사의 트레빌, 실존 인물 장 아르노 뒤 페레르 백작의 파란만장한 생애
르 낭이 그린 트레빌 백작의 초상화

장 아르노 뒤 페레르(Jean-Arnaud du Peyrer), 트레빌(트루아빌) 백작은 1598년 올로롱생트마리에서 태어나 1672년 5월 8일 트루아빌에서 생을 마감한 프랑스 군인입니다. 그는 알렉상드르 뒤마의 소설 『삼총사』에 등장하는 '트레빌 씨'의 실제 원형이 된 인물로, 루이 13세의 깊은 신뢰를 받았던 머스키티어 중대의 지휘관이었습니다.

상인의 아들에서 신사로

1598년 올로롱의 마르카데 광장에서 태어난 그는 이 도시 한 상인의 아들이었습니다. 가문에 '트루아빌(Tréville)'이라는 이름을 처음 도입한 사람은 아버지 장 뒤 페레르였습니다. 1607년, 그는 쉬기스 인근 수(Soule) 지방의 바스크 계곡에 위치한 트루아빌 영지(엘리사비아와 카자마조르)를 매입했습니다. 당시 바스크 지방에서는 귀족 신분이 토지에 귀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영지 구입은 곧 귀족 지위의 획득을 의미했습니다. 이렇게 아버지는 스스로를 신사(gentilhomme)로 여길 권리를 얻었고, 수 자작령의 신사들 사이에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군인의 길, 그리고 머스키티어 대장까지

1616년, 열일곱 살의 트레빌은 무기 장사를 접고 파리로 향했습니다. 그는 프랑스 근위대에 신사 후보생(cadet-gentilhomme)으로 입대해 군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1627년부터 1628년까지 이어진 라 로셸 공성전에는 머스키티어로 참전하여 전투 중 부상을 입기도 했습니다.

트레빌은 루이 13세 국왕의 전폭적인 신뢰를 얻었고, 1634년 머스키티어 중대의 대위-중령(Captain Lieutenant), 즉 실질적인 지휘관 자리에 올랐습니다. 흥미롭게도 1640년 그가 선발한 유명한 신병들 가운데 일부는 직간접적으로 그의 친족 관계에서 나왔습니다.

  • 아토스: 브르타뉴 출신의 세련된 사촌 중 한 명
  • 포르토스: 트레빌의 처남이자 에사르 영주 프랑수아 드 기용의 추천으로 입대
  • 아라미스: 그의 육촌 중 한 명

소설 속 설정과 놀랄 만큼 닮아 있는 대목입니다.

캉마르 사건과 추방

바로 그 무렵, 캉마르(Cinq-Mars)와 프랑수아 오귀스트 드 투 사건이 터졌습니다. 특히 말년의 루이 13세는 리슐리외를 개인적으로 싫어했지만, 동시에 그의 능력 없이는 정치를 운영할 수 없었습니다. 오로지 왕을 위해서만 충성하던 트레빌 역시 왕과 같은 감정을 함께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반감을 알아차린 캉마르는 리슐리외를 제거하려는 음모를 꾸미며 트레빌을 찾아 뜻을 타지했습니다. 트레빌은 "나는 결코 누군가를 살해하는 일에 연루된 적이 없다"고 답했지만, 동시에 만약 왕이 그렇게 명한다면 복종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내비쳤습니다.

결국 리슐리외는 음모를 적발해 캉마르와 드 투를 처형했습니다. 트레빌을 음모에 직접 연루시킬 증거는 없었지만, 리슐리외는 그가 왕의 명령 하나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런 강력한 적수를 결코 용납할 수 없었고, 트레빌의 즉각적인 추방을 요구했으며, 왕은 이에 굴복했습니다.

복귀, 그리고 또 다른 적수 마자랭

1642년 12월 4일 리슐리외가 세상을 떠나자, 루이 13세는 즉시 충신 트레빌을 소환하여 머스키티어 중대의 지휘권을 되돌려주었습니다. 그러나 행복은 짧았습니다. 몇 달 뒤인 1643년 5월 14일, 루이 13세마저 서거하고 말았습니다.

주군이자 보호자를 잃은 트레빌에게 희망적인 소식이 있었습니다. 섭정 오스트리아의 안느가 남편의 충실한 신하를 포상하기 위해 1643년 트루아빌을 백작령(county)으로 승격시킨 것입니다.

하지만 머스키티어 대장과 새 재상 마자랭 사이에는 곧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적개심이 형성되었습니다. 마자랭은 이 자리를 자신의 조카 망치니(Mancini)에게 넘겨주고 싶어 했지만, 트레빌은 자진해서 물러날 생각이 없었습니다. 결국 1646년, 재상은 머스키티어 중대 자체를 해산시켜 버렸습니다.

말년: 고향 바스크로 돌아가다

이로써 트레빌의 군 경력은 끝이 났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는 아직 마흔일곱 살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소극적 저항의 시기를 보냈습니다. 프롱드(Fronde) 반란 진영의 호소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고향 바스크 영지에 마음을 담았으며, 마침내 푸아(Foix) 지방 총독직을 수락했습니다. 1660년부터 1663년까지는 트루아빌에 엘리사베아(Eliçabéa) 성을 건축했고, 1672년 그 성에서 생을 마감했습니다.

트레빌 백작은 두 아들을 남겼지만, 두 아들은 모두 후사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가문은 이렇게 역사 속으로 조용히 사라졌지만, '트레빌 씨'라는 이름은 뒤마의 소설을 통해 오늘날까지 생생하게 기억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