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유티카: 페니키아인이 세운 고대 항구 도시의 역사와 유적

유티카(라틴어: Utica)는 페니키아인들이 건설한 고대 항구 도시로, 오늘날 튀니지 북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위치

유티크(Utique) 유적은 비제르타(Bizerte) 주에 속해 있으며, 이 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고고학 유적지입니다. 유티크 구역은 주의 남동부에 자리하고 있으며, 인근에는 앙시르 부 샤투르(Henchir Bou Chateur) 마을이 있습니다. 고대에는 지중해가 현재의 유적지까지 닿아 있었지만, 메제르다(Medjerda) 강이 운반한 퇴적물이 쌓이면서 도시는 점차 내륙으로 고립되었습니다.

현재 이 유적지는 튀니스에서 33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며, 다른 역사 유적을 보유한 네 도시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 자나(Zhana): 유적지에서 2킬로미터 떨어진 마을로, 중요한 기념물들을 보유하고 있습니다.
  • 가르 엘 멜(Ghar El Melh): 산과 바다 사이 좁은 땅에 위치한 도시로, 여러 요새가 남아 있습니다.
  • 엘 알리아(El Alia): 안달루시아 양식의 기념물을 간직한 도시입니다.
  • 메틀린(Metline): 안달루시아 양식의 매력적인 해안 도시입니다.

역사

유티카는 서지중해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로 꼽힙니다. 대플리니우스, 아리스토텔레스, 벨레이우스 파테르쿨루스 등에 따르면 이 도시는 기원전 1101년에 건설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이 도시 국가는 상업적 필요에 의해 탄생했으며, 티레(Tyre)와 카디스(Cadiz)를 오가는 항로에서 필수적인 무역 거점 역할을 했습니다.

여러 저자들은 유티카가 카르타고보다 3세기 이상 앞서 세워졌음을 인정하지만, 고고학 발굴 결과에서는 이를 뒷받침할 증거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기원전 8세기 이전의 유물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한편 유티카는 티레에 대해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하며 매년 관습적인 공물만을 보냈고, 기원전 5세기에 이르러서야 카르타고의 지배 아래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긴 역사 동안 유티카는 여러 차례 진영을 바꾸었습니다. 처음에는 포에니(페니키아) 도시로서 시칠리아의 그리스인들과 맞서 싸웠고, 이후 로마와도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제3차 포에니 전쟁에서는 로마 편에 섰고, 그 결실로 이웃 카르타고가 로마에 함락되자 충성에 대한 보상을 받았습니다. 유티카는 '자유롭고 면책된' 포에니 제도를 지닌 일곱 도시 중 하나로 인정받았으며, 로마 속주 아프리카의 수도로 승격되고 카르타고 영토의 상당 부분을 할당받았습니다. 그러나 로마 제국의 성립과 함께 카르타고가 재차 부흥하면서 유티카는 그 지위를 잃고 밀려나게 됩니다.

기원전 49년부터는 카이사르파와 폼페이우스파 사이의 내전 소용돌이에 휘말려 폼페이우스 지지자들의 집결지가 되었습니다. 탑수스 전투에서 패배한 뒤인 기원전 46년, 폼페이우스파였던 카토는 카이사르의 손에 넘어지기를 피하기 위해 이곳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치세에는 자치권을 부여받아 '무니키피움 율리움 우티켄세(Municipium Julium Uticense)'라 불렸으며,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에는 로마 식민도시로 승격되어 '콜로니아 율리아 아일리아 하드리아나 아우구스타 우티카(Colonia Iulia Aelia Hadriana Augusta Utica)'로 개칭되었습니다.

3세기 중반경에는 주교 아우렐리우스가 카르타고 공의회(256년)에 참석한 기록을 통해 이 도시에 기독교가 뿌리내리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252년에는 '마사 칸디다(Massa Candida)'라 불리는 장소에서 다수의 순교자가 처형되었으며, 이곳에는 후에 바실리카가 세워졌습니다.

439년에는 겐세리크(Genseric)가 이끄는 반달족에게 함락되었고, 534년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이 이를 탈환했습니다. 그러나 이후 항구가 퇴적물로 막히면서 도시는 점차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메제르다 강의 퇴적물이 유티카 만을 메워 옛 항구를 바다에서 점점 멀어지게 했고, 그 결과 현재 유적지는 해안에서 10킬로미터나 떨어진 내륙에 자리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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