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달족(Vandals)의 유산은 전통적으로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되어 왔다. 몇몇 지명, 예컨대 안달루시아(Andalusia)가 아랍어 '알-안달루스(Al-Andalus)'를 거쳐 '반달루시아(Vandalusia)'에서 유래했다는 설을 제외하면, 그들의 흔적은 무엇보다 현대 어휘 속에서 가장 뚜렷하게 살아남았다.
현대 어휘에 남은 흔적, '반달리즘'의 탄생
실제로 많은 언어에서 '반달(vandal)'이라는 말은 공포, 맹목적인 파괴, 약탈, 약취를 연상시키는 강한 부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프랑스어에서 이 단어가 경멸적인 의미로 처음 사용된 것은 1734년, 볼테르의 필치에 의해서였다. 이후 1794년에는 당시 국민공회 의원이던 그레구아르 신부(Abbé Grégoire)가 최초로 '반달리즘(vandalisme)'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P. 리셰). 이렇게 하여 반달족은 프랑스 역사학에서 중세 초기 야만 민족의 대표적인 고정관념으로 굳어지고 말았다.
과장된 약탈자·파괴자 이미지
그러나 약탈자이자 파괴자라는 그들의 평판은 사실 고대 기록가들, 특히 아프리카의 가톨릭 교회 인사들과 그 지지자들, 무엇보다 빅토르 데 비타(Victor de Vita)에 의해 크게 과장된 것이다. 실제로 반달족이 남긴 파괴는 같은 시기 로마 제국을 침입한 다른 게르만 민족들의 그것과 비교해 더 심각하지 않았다.
북아프리카의 아리우스파 왕국
북아프리카에 세운 반달족의 아리우스파 왕국은 모범적일 만큼 체계적으로 조직되어 있었다. 종교 문제에서 가톨릭 신자나 유대인 백성들에게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자신들의 권위에 저항하려는 가톨릭 성직자들의 움직임은 단호히 분쇄했다. "아리우스파였던 반달족은 가톨릭 신자들을 잔혹하게 박해했다. 많은 성직자들이 순교를 당했다."는 기록이 이를 보여준다. 아울러 그들은 부유한 로마계 기독교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약탈하고, 백성들에게 무거운 토지세를 부과하기도 했다.
조직화의 모범이 된 로마 약탈
455년의 로마 약탈은 파괴나 학살 없이 진행되었으며, 오히려 조직력의 모범 사례로 꼽힌다. 반달족은 교황 레오 1세와 합의를 맺어 폭력 없이 도시의 재물을 수거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그들은 로마를 여러 개의 작은 구역으로 나누어 차례대로 방문했고, 각 구역의 귀중품을 질서정연하게 실어 날랐다.
가톨릭 성직자의 눈에 용서될 수 없는 두 가지 죄
그럼에도 가톨릭 성직자들의 눈에 반달족은 두 가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지은 존재였다.
- 가톨릭이 심각한 이단으로 규정한 아리우스파 의식의 기독교를 신봉했다는 점, 로마 교회의 교부로 추앙받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죽음과 연결된다는 점, 그리고 가톨릭 신자들을 폭력적으로 박해했다는 점
- 로마와 교회의 재산을 공격해 손에 넣었다는 점
이러한 원한을 이어받은 가톨릭 계열의 역사가들은 결국 '반달(Vandal)'이라는 단어 자체를 그 담긴 불실과 함께 격추시키고 '악마화'해 버렸다. 흥미로운 대조는, 반달족과 함께 행동한 동료 민족 알란족(Alans)의 이름이 프랑스어에는 흔한 이름 '알랭(Alain)'의 형태로 전해져 아무런 부정적 뉘앙스 없이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