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타 제3군단, 아프리카의 유일한 로마 군단
아우구스타 제3군단(Legio III Augusta)은 로마 속주 아프리카에 주둔한 유일한 군단이었다. 사료에는 이 군단이 여러 이름으로 언급되는데, 대표적으로 'exercitus Africae(아프리카군)', 'exercitus provinciae Africae(아프리카 속주군)', 'legio III Augusta', 'exercitus africanis' 등이 있다. 이 군단에 관한 정보의 대부분은 비문 연구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얻어진다.
군단의 역사
내전기의 군대가 해산된 후, 아우구스투스는 아프리카 속주 통제를 위해 두 개의 군단을 남겼으나, 기원후 6년부터는 제3군단 '아우구스타'만이 그곳에 남게 되었다. 이후 군단은 암마에다라(Ammaedara, 오늘날 튀니지 하이드라)로 이동하였다.
제3군단의 역사는 파란만장했다. 본영은 여러 차례 옮겨졌고, 병력 구성 또한 매우 다양했다. 238년 '고르디아누스 반란' 이후 해산되었으나, 253년 발레리아누스 황제 때 재편성되었다. 서기 321년의 법률에서도 여전히 그 존재가 언급되며, 『노티티아 디그니타툼(Notitia Dignitatum)』에도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아프리카에 끝까지 주둔했음을 알 수 있다.
지휘 체계와 편제
군단의 지휘는 초기에는 황제 직속의 프로프라에토르 레가투스(propraetor legate), 즉 전직 프라이토르가 맡았으며, 이들은 재임 중 집정관(suffect consul)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후에는 속주 총독으로부터 사실상 독립된 레가투스가 지휘권을 갖게 되었고, 적어도 하드리아누스 황제 치세 이후에는 이 레가투스가 곧 속주 총독의 기능을 겸임하였다.
다른 모든 군단과 마찬가지로 제3군단은 정예 보병 5,000명과 기병 120명을 보유했다. 이들은 원로원 계급 출신의 라티클라비우스 호위관(laticlavius tribune) 1명, 기사 계급 출신의 진영 관리관(camp prefect) 1명, 기사 계급 출신의 앙구스티클라비우스 호위관(angusticlavius tribune) 5명, 세크스트리르(sexmenstris) 호위관 1명 이상, 그리고 59명의 백인대장(centurio)과 수백 명의 장교들에 의해 지휘·감독되었다. 이 밖에 부대 잡무에서 면제된 병사(immunes)와 기본급을 받는 병사들로 편제가 이루어졌다.
보조병 부대의 역할
아프리카에서 보조병(auxilia)은 더 긴 복무 기간이 요구되었고, 장비도 상대적으로 소박했다. 특히 하드리아누스 시대에는 보조병 기병들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는데, 이는 이동성이 높은 반유목민들을 통제해야 할 필요성 때문으로 설명된다. 궁수 부대의 존재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대표적인 보조 코호트로는 아프리족 제2 플라비아 코호트(cohors II Flavia Afrorum)와 하미오룸 제2 코호트(cohors II Hamiorum)를 들 수 있다.
아프리카 프로콘술라리스 속주에서는 이미 평화가 정착된 이후에도 65년까지 실리아나 기병대(ala Siliana)라는 경비 부대가 운영된 것이 확인된다. 이후 이 임무는 정예 부대인 최초의 도시 코호트(urban cohort)가 담당하게 되었다.
플라비우스 왕조부터 방어 체계는 아우레스(Aurès) 산맥 방향으로 발전했다. 이 시기 일부 부대의 전문화가 뚜렷하게 나타나는데, 예컨대 시리아 출신 궁수 부대나 '코호르스 I 아우구스타 네르비아나 벨록스(I Augusta Nervana Velox)' 등이 그렇다. 한편 '에퀴타타(equitatae)', 즉 혼성 코호트는 종종 잘못 해석되어 왔다. 이들은 흔히 오해하듯 순수한 '기마' 부대가 아니라 기병과 보병이 섞인 혼합 부대였다.
아프리카에 주둔한 혼성 코호트
아프리카에 주둔했던 것으로 알려진 5~6개 혼성 코호트는 다음과 같다.
- 칼키덴인 제1 코호트
- 플라비아 제1 코호트
- 트라키아인 제2 코호트
- 콤마게네인 코호트
- 루시타니아인 제7 코호트
본영의 이동 경로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군단 본영은 아마도 북부 튀니지, 즉 이미 로마화가 진행된 케프(Kef, Sicca Veneria) 지역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군대의 임무는 평정된 텔(Tell) 지역에서 아직 통제가 미흡했던 도르살(Dorsal) 산맥을 감시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81년에는 군단 분견대 하나가 람베세(Lambèse, 오늘날 알제리 람바에시스)에 주둔한 것이 확인되는데, 이곳은 훗날 아우레스 산맥 기슭에 자리한 군단의 본영이 된다.
암마에다라 이후 군단은 베스파시아누스 치세인 75~76년경 오트 플랭(Hautes-Plaines) 가장자리의 테베사(Tébessa, Théveste)에 정착했다. 아마도 하드리아누스 치세인 115~120년경까지 그곳에 머물렀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진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며, 이러한 가설은 주로 해당 유적지에서 출토된 군단병들의 묘비명에 근거한다.
이러한 배치는 누미디아 남부의 군사 점령을 완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람베세에 도착한 제3군단은 사두정치기(Tetrarchy)까지 그곳에 주둔했다. 그 이후 진영의 행방은 알 수 없는데, 비문이 완전히 사라진 것으로 미루어 진영이 버려졌을 가능성이 있다.
주요 주둔지
군단이 상당수의 거점을 유지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 전모는 확실하지 않다. 카르타고와 카스바(Casbah) 외에 다양한 유적이 확인되나, 모두 군단 주둔지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 아드 마레스(Ad Maires) 진영
- 람베세 동쪽 110km 지점의 주이(Zoui, Vazaiui) 역참
- 람베세 동쪽 헨치르 엘함맘(Henchir el-Hammam, Aquae Flavianae)에서 확인된 군단병의 흔적
- 부 넴(Bu Njem)
로마화의 핵심 동력
아프리카군은 아프리카에서 로마화와 황제에 대한 충성심을 확산시키는 중요한 매개체였다. 3세기부터 군단 내 아프리카 출신 병사의 비중이 점차 커져, 군단병의 92%가 식민시(colonia) 혹은 무니키피움(municipium) 출신이었고, 2세기 말에는 군단 병력의 60%가 로마화된 아프리카인으로 구성되었다. 이 때문에 프랑스의 로마사 학자 이ves 르 보엑(Y. Le Bohec)은 이 군단을 두고 진정한 '시민 양성 기계(citizen machine)'라고 표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