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만 제국은 18세기부터 유럽 열강들의 급속한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면서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반적으로 1683년 빈 포위전의 참패를 제국 실질적 쇠퇴의 시작점으로 보며, 이 실패는 곧이어 첫 영토 상실로 이어졌습니다.
쇠퇴의 징후: 크림 반도 상실과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1782년, 예카테리나 2세 치하의 러시아는 크림 반도를 손쉽게 강점했습니다. 이스탄불 대재상 관저의 웅장한 정문에서 유래한 이름인 '고문관(Sublime Porte)', 즉 술탄 정부는 스스로 맞설 역량이 부족하다고 판단하여 아무런 대응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1798년에는 프랑스군이 이집트에 상륙하여 '고문관과의 우의'를 내세운 채 3년간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이러한 모호한 태도는 이집트의 통치자 메흐메트 알리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고, 그는 훗날 유사한 방식으로 행동하게 되며 평생 보나파르트에 대한 존경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유럽의 병자'와 탄지마트 개혁
19세기에 접어든 제국은 러시아가 붙인 별칭인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라 불리며 해체의 길을 걸었습니다. 같은 세기에 제국은 잃어버린 권력과 번영을 되찾기 위해 근대화에 착수합니다.
이 시기는 1808년 술탄과 봉건 영주들 사이에 체결된 동맹 헌장(Sened-i Ittifak)으로 개막되었으며, 이 헌장은 중앙 정부에 대한 봉건 영주들의 권력을 공식적으로 확인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1839년에는 탄지마트 칙령(Tanzimat Fermanı)이 반포되어 중앙 정부가 제국 근대화를 위한 일련의 입법 조치들을 발표했습니다. 이 시기에는 프랑스와 영국 등 유럽 국가들이 오스만 제국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또한 1847년에는 노예제 폐지라는 획기적인 개혁이 단행되었습니다. '탄지마트'라 불리는 이 개혁기는 1876년 제정된 최초의 군주제 헌법과 함께 막을 내렸습니다.
▲ 1683년까지의 오스만 제국 정복 영역 지도
가속화된 영토 상실
1830년, 서구 열강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가 마침내 독립을 쟁취했습니다. 이집트 총독 메흐메트 알리는 독립 군주처럼 행세하며 자신의 아들에게 세습을 인정받았는데, 이는 중앙 정부에 대한 도전의 선례가 되었습니다. 한편 프랑스는 알제리를 강점했습니다. 제국은 영국과 프랑스의 보호 덕분에, 특히 크림 전쟁 기간 동안에야 간신히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낼 수 있었습니다.
세기가 바뀌 무렵, 제국은 발칸반도에서 완전히 밀려나 수도가 위치해 있던 동트라키아의 좁은 영토만을 간신히 유지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