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사

카를 5세(찰스 퀸트): 유럽 최대 제국을 통치한 합스부르크의 황제

카를 5세(Karl V, 스페인어: Carlos I, 1500년 2월 25일 ~ 1558년 9월 25일)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군주로, 신성로마제국 황제(1519~1555),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1516~1556), 시칠리아 국왕 카를로 4세, 브라반트 공작 카를 2세 등 수많은 작위를 겸했다. 그는 벨기에 헨트에서 태어나 말년을 스페인 유스테 수도원에서 보내며 생을 마감했다.

유럽 왕가들의 연합이 낳은 상속자

카를 5세는 유럽 여러 왕가 간의 정략결혼이 만들어낸 결과물로, 단순한 상속만으로 유럽 최대의 영토를 거머쥐게 되었다. 아버지는 오스트리아 대공이자 카스티야 국왕인 미남공 필리ppo 1세(필립 1세), 어머니는 '미친 여왕'이라 불린 카스티야의 후아나 1세이다.

외조부모인 아라곤의 페란도 2세와 카스티야의 이사벨 1세, 이른바 '가톨릭 군주'는 결혼을 통해 스페인을 통합했다. 친조부는 신성로마제국 황제 막시밀리안 1세로, 카를은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친조모는 부르고뉴의 용담공 샤를의 상속녀 마리 드 부르고뉴로, 카를은 그녀에게서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오늘날의 베네룩스)와 프랑슈콩테를 물려받았다.

단계별 상속과 즉위

1517년까지 카를은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에서 시에브르 영주 기욤 드 크루아의 보호 아래 자랐으며, 훗날 교황 하드리아노 6세가 되는 위트레흐트의 아드리아누스에게 교육받았다. 1506년 아버지 필리ppo 1세가 사망하자 부르고뉴령 네덜란드와 프랑슈콩테를 상속받았다.

1516년 외조부 페란도 2세가 사망하자 어머니와 함께 카스티야 국왕이 되었고, 아라곤, 상(上)나바라, 그라나다, 나폴리, 시칠리아, 사르데냐, 발레아레스 제도, 몰타, 그리고 스페인령 아메리카까지 물려받았다.

1519년에는 조부 막시밀리안 1세가 사망하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오스트리아 영토를 상속받았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를 제치고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되었다. 두 사람은 평생 경쟁 관계에 놓이게 된다.

프랑스와의 전쟁

재위 기간 동안 카를은 프랑스와 수차례 전쟁을 벌였다. 첫 번째 전쟁은 1521년 북부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수아 1세를 포로로 잡아 마드리드에 1년간 유폐했고, 프랑스가 아르투아 백작령, 부르고뉴 공국, 플랑드르 백작령에 대한 영유권과 북부 이탈리아(특히 밀라노 공국)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마드리드 조약(1526)을 체결하게 했다. 그러나 석방된 프랑수아 1세는 조약을 파기했고, 이로 인해 새로운 전쟁이 촉발되어 1527년 프랑스에서 배신한 부르봉 공작 샤를 3세가 로마를 함락하는 사태가 벌어졌으며, 1528년에는 로트레크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나폴리 왕국으로 진군했다.

1527년 카를의 군대는 로마를 약탈하고 교황 클레멘스 7세를 수개월간 감금하기도 했다. 이 사건은 카를에게 곤혹을 안겼지만, 한편으로는 잉글랜드의 헨리 8세가 후계자를 낳지 못한 아내(카를의 이모) 아라곤의 캐서린과의 혼인 무효를 교황에게 요청하는 것을 막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1530년대 헨리 8세가 잉글랜드 성공회의 독립을 선언하는 배경 중 하나가 되었다.

1529년 프랑스와 체결한 캉브레 조약으로 전쟁이 일단락되었고, 교황 클레멘스 7세와 맺은 바르셀로나 화약은 카를의 황제 지위를 확정짓고 이탈리아에서 정복한 영토를 유지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종교 개혁과의 대립

1521년 카를은 보름스 제국의회에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를 소환하며 신변 안전을 보장했다. 같은 해 그는 루터와 그 추종자들을 단죄했으나, 다른 정치적 현안에 시달린 나머지 프로테스탄트의 확산을 막지 못했다.

1545년 트렌토 공의회의 개최는 반종교개혁 운동의 시작을 알렸고, 카를은 제국 내 일부 제후들을 가톨릭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1546년에는 슈말칼덴 동맹을 공격하여 1547년 작센 선제후 요한 프리드리히를 격파하고 헤센 방백 필리pp 1세를 포로로 잡았다. 같은 해 뮐베르크 전투에서 프로테스탄트 동맹군을 물리쳤으며, 아우크스부르크 제국의회에서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양측 모두를 수용할 수 있기를 바라는 교리적 절충안을 마련했다. 1548년에는 네덜란드 17주를 제국과 프랑스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별도의 실체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1552년 개신교도들의 양심의 자유를 보장하는 파사우 화약에 서명할 수밖에 없었다. 같은 해 다시 프랑스와 전쟁을 벌였지만, 기즈 공작 프랑수아가 방어하던 메스 공방전에서 실패를 거듭했다.

오스만 제국과의 대항

카를은 오랫동안 오스만 제국과 술레이만 대제에 맞서 싸웠다. 오스만 세력은 지중해 연안에서 합스부르크 영토와 서유럽의 평화를 위협하고 있었다. 카를은 아프리카에도 여러 차례 원정을 떠나, 1535년에는 튀니스에서 바르바로사(하이르 앗딘)를 상대로 중요한 승리를 거두었다.

1536년에는 동맹국인 사보이 공작 카를로 3세가 솔레이만과 손잡은 프랑수아 1세의 공격을 받자 다시 무기를 들었으나, 프랑수아 1세가 마르세유를 포위하는 상황에서 카를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고 1538년 니스에서 10년 휴전을 체결했다.

1538년 프랑수아 1세가 강화에 동의했지만, 1542년 그는 다시 오스만과 동맹을 맺었다. 한편 1539년 카를은 방심한 프랑수아 1세의 허락을 받아 플랑드르의 헨트 시민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프랑스 영토를 통과할 수 있었고, 파리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1541년에는 알제 원정에 실패했다.

1542년 프랑스와의 전쟁이 재개되자 카를은 잉글랜드의 헨리 8세와 동맹을 맺었지만, 세리솔레스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1544년 크레피앙라노아 휴전으로 귀결되었다. 이후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숨돌릴 필요가 있었던 카를은 오스만 제국과 굴욕적인 조약까지 체결하게 되었다.

퇴위와 말년

1556년 노령과 질병으로 쇠약해지고 연이은 좌절에 쓰라려진 카를 5세는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이미 수개월 전부터 오스트리아 외의 영토들(부르고뉴-프랑슈콩테 공국 포함)은 아들 스페인의 펠리ppe 2세에게, 오스트리아 영토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지위는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각각 넘겨졌다.

특히 심한 통풍에 시달리고 1555년 어머니 후아나 1세('미친 후아나')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은 그는 1556년 스페인 마드리드 근처의 유스테 수도원으로 은퇴했다. 2년 뒤인 1558년, 당시 그 지역의 풍토병이던 말라리아로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아들 펠리ppe 2세가 이를 위해 건립한 엘 에스코리알 왕가 수도원의 국왕 묘소(스페인 국왕들의 판테온)에 안장되어 있다.

결혼과 후손

카를은 포르투갈의 이자벨라 인팡타(1503~1539)와 결혼했다. 그녀는 포르투갈 국왕 주앙 3세의 여동생으로, 주앙 3세 역시 그 직전에 카를의 여동생인 오스트리아의 카타리나와 결혼함으로써 스페인 및 신성로마제국과의 동맹을 강화했다. 두 사람 사이에는 훗날 스페인 국왕이 되는 아들 펠리ppe 2세가 태어났다.